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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의 상처들

앨범 ‘TEEN TROUBLES’ (검정치마, 2022)를 중심으로

by 권등대

검정치마는 “음악 하는 여자”라는 곡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상처주기엔 너무 상처가 많아’.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남에게 상처 주는 일에 인색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사랑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잘하듯 반대로 상처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잘 내는 거라고 부정할 수도 있다. 배운 것이 상처뿐인 사람은 상처 내는 법 밖엔 모르지 않겠느냐고. 분명 그런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나 어쨌든 이 가수는 일단 자신이 알기로는 그 반대라고 노래한다. ‘받은 걸 다 돌려주긴 욕심이 많’다고 말한다. (“Bollywood”) 그리고 나 역시 일단은 이 가수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이 가수의 의견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검정치마는 어떤 상처들을 갖고 있기에 남에게 같은 상처를 주는 것을 꺼려하는 것인지 감히 살펴보기로 한다.


뭘 기대하는지 알아

어디서 들어봤겠지, 먼 별들의 고향

넌 근데 잘못 온 거야

여긴 춤과 눈물에 순서가 없는 걸 감당이 안되네 (…)​

밤엔 내가 만개해요

밟지 말고 꺾어가요

어차피 나는 향도 가시도 없이 막 아무렇게나 자랐네

​- “Bollywood” 中​​​​

검정치마의 곡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곡 중 하나는 아마 “Hollywood”일 것이다. ‘먼 별들의 고향’인 할리우드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곡이다. “Hollywood”와 같은 곡을 기대하며 자신의 앨범들, 특히 『THIRSTY』 앨범을 찾은 사람에게 그는 답한다. ‘잘못 온 거’라고. 여긴 할리우드가 아니라 발리우드라고. 발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실컷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노래하고 춤을 추고 또 갑자기 슬픈 장면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일 테다. 즉 검정치마의 앨범에 실린 곡들은 발리우드 영화처럼 ‘춤과 눈물에 순서가 없’다. 슬픔과 웃음이 이리저리 엉켜있다. 듣는 이는 ‘감당이 안’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검정치마 역시 감당이 안된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한 곡들을 쓰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까. 그리고 그러한 곡들은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향도 가시도 없이 막 아무렇게나’ 자라 왔다고 고백하는 그의 십 대는 어떤 모양새였을지 궁금해진다. 답은 새 앨범 『TEEN TROUBLES』에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난 그저 열일곱을 살던 중이었어요

귀가 찢어질 듯 매미가 울던 1999년의 여름밤

혹독하고 푸르던 계절이 깊게 긁고 간 자리​

- “Flying Bobs”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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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치마가 자신이 여태껏 낸 앨범 중 가장 사적인 앨범이라고 밝힌 『TEEN TROUBLES』는 검정치마의 열일곱 시절 이야기로 가득하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첫 곡은 위와 같은 내용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1999년의 여름밤은 혹독했고 푸르렀고 그에게 깊게 긁힌 자국을 남긴 채 지나간 듯하다.



그녀가 없는 방안엔 홀어머니 혼자 취해있고

집에 가기 싫은 우리는 같이 안갯속에 떨어지네 (…)​

그녀가 한번 단 한번 잠깐 돌아왔던 적이 있어

창백한 피부 위로는 말라붙은 피와 베인 상처

마지막으로 몰고 왔던 먹구름이 걷히기도 전에 금방 다시

사라졌던 그녀는 우릴 알아보지 못했었네

그게 난 아직도 선명하네

일렉트라, 더 이상 니가 밟을 선은 없어

우리 말고는 아무도 널 안 찾아

우리 말고는 아무도 널 몰라​

- “Electra” 中


먼저 열일곱 친구들과의 사연을 보자.

일렉트라의 홀어머니는 약쟁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지 오랜만에 돌아온 일렉트라의 하얀 얼굴에는 ‘말라붙은 피와 베인 상처’가 가득하다. 집에 가기 싫어 검정치마와 친구들과 ‘안개’ 같은 담배 연기 속에 파묻혀 있곤 했던 일렉트라는 그러나 아직 열일곱이었기에 밤이면 결국 집에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사라졌다가 돌아온 일렉트라는 검정치마와 친구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 역시 약에 절어 살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광경이 검정치마에게 큰 충격이었는지 ‘그게 난 아직도 선명하’다고 읊조린다. “Electra”의 모든 가사가 슬프지만 개인적으로 이 노래에서 가장 슬프다고 느끼는 구절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널 안 찾’고 ‘우리 말고는 아무도 널 모른다’는 후렴구다. 우리가 너의 유일한 친구라는 든든한 말이기도 한 반면에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쓸쓸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렉트라가 먼저 이들을 잊어버렸고 일렉트라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렸다. 더 이상 넘을 선도 없어진 일렉트라의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검정치마와 친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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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oh jeff

니가 시한부 인생을 사는걸

우리 알고 지낸 게 이제 20년이 넘어

니가 죽으면 맘 아플 거야

니 편두통은 항상 꾀병이라 믿었지 (…)​

jeff oh jeff

쓰레기통엔 저녁밥이 있고

빈 기차칸이 너희 집이지​

- “Jeff And Alana”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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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친구 제프에게서 문자가 온다. 검정치마는 문자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 오타를 치기에 이른다. 제프가 사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중이라는 연락이었을 것이다. 함께 놀 때면 제프는 자주 편두통을 호소하곤 했는데 그게 그저 꾀병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던 것이다. 빈 기차 칸이 집이고 저녁밥을 쓰레기통 안에서 찾곤 하던 제프는 그저 아나키즘을 꿈꾸는 아이였다. 그 당시 검정치마는 열일곱이었으면서 제프에게 너를 알고 지낸 지 20년이 넘었다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제프는 검정치마에게 그만큼 편안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러나 그런 제프를 내년에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john fry

내 입술의 유일한 남자

내 중궈 여자 친구보다 니가 훨씬 이뻤다는 걸 (…)​

경찰이 니네 집 대문을 박차고

아래층 검은 개가 크게 짖으면

난 창문을 넘어​

john fry

그리고 그녀를 바래다줬었지

통통한 손이 내 바지로 들어와

근데 니 생각이 났어

참 이상한 날이야​

- “John Fry” 中


이제 열일곱의 사랑을 볼 차례다.

“John Fry”를 이해하려면 『TEEN TROUBLES』 앨범과 함께 공개된 단편 영화를 참고해야 한다. 존은 검정치마와 항상 어울리던 친구들 중 한 명이었고 유독 예쁜 남자아이였다. 보란 듯이 검정치마의 마음을 갖고 놀았던 첫사랑보다도, 그 첫사랑을 잊으려 만나던 중국인 여자 친구보다도 훨씬 예뻤다. 그리하여 존은 검정치마의 ‘입술의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 검정치마가 입을 맞춘 유일한 남자. 자신도 왜 갑자기 존에게 입을 맞추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검정치마는 존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존은 검정치마를 피했고 자꾸 싸움을 하고 다니며 심히 엇나가기 시작한다. 곧 감옥을 간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경찰이 존의 집을 들락거리는 일이 잦아지던 중에 존과의 연락이 끊긴다. 어쩌면 존도 검정치마에게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피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왜 갑자기 엇나가기 시작했을지를 생각해보면 그렇다.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도 여전히 존이 생각나는 날이 있었다고 말하는 열일곱 살 소년은 서투름으로 인해 어쩌면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이 될 수 있었던 이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러나 서투름은 죄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엇갈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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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 Ling 이해하려 하지 마

연약한 걱정밖에 없는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

​Ling Ling 이건 한 줌 모래야

흘리는 순간 떠내려가는 원래 그런 사이인 거야​

- “Ling Ling”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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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링은 ‘설렘도 지겨워지려는 때’가 온 탓에 검정치마에게 이별을 선고한다. 단순히 권태가 왔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연애 초의 설렘과 더불어 검정치마만의 독특함이 주던 설렘이 점점 거슬리는 것으로(독특함은 상대로 하여금 꾸준한 배려를 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겨운 것으로 변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검정치마는 링링에게 저라는 사람은 ‘연약한 걱정밖에 없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여 달라고, ‘평범한 거는 너랑 나에게 어울리지 안’ 는다며 링링을 붙잡는다. 그는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면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그녀와 저의 사이는 ‘흘리는 순간 떠내려가는’ ‘한 줌 모래’와 같은 사이라고 아프게 정의한다. 둘의 사랑은 아주 소량이라도 흘리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손 안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한 번 식기 시작한 음식은 끝을 모르고 차가워지기 마련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춤과 노래는

갑자기 멈춰버렸고 (…)​

쾌락이 지나간 자린 수줍던 우리의 무덤

신나게 밟고 온 길은 지도에 없는 곳이고​

- “Baptized In Fire (불세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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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고 짧게 타오를 때 가장 아름다운 거야

영원한 걸 원했겠지만 이제 바삭해진 껍데기야(…)​

잡을 수 없는 걸 따라서 방황했던 어린 날의 기억

앙상하게 꿈을 꿨지

담담하게 녹슬었네 ​

- “Cicadas (매미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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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그 해 여름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검정치마는 단편영화에서 1999년 여름의 끝자락에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고 말한다. 영원할 것 같이 춤추고 노래하던 몸은 어느 순간 갑자기 굳어버린다. 춤추고 노래하던 몸은 ‘바삭해진 껍데기’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쾌락이 머물던 자리는 무덤이 되었고 신나게 가로지르던 길은 지도에도 뜨지 않는 오지였음을 깨달았으며 절대 잡히지 못할 것을 꿈꾸던 앙상한 청춘은 담담하게 녹슬어버렸다. 그러니까 열일곱 그들은 여름의 사건들로 인해 저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야

쳐다보지도 말거라

상처받고 낙오된 짐승들은

짖어야 잠에 든단다 (…)

​다른 볼도 그냥 내줘라

입 맞추게 숙여 대 주어라

붉게 붉힌 얼굴들 모두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

- “​어린양” 中​​​


『TEEN TROUBLES』에서 다른 곡들과 유독 섞여들지 않는 곡이 있는데 바로 “어린양”이다. 갑자기 다 달관한 듯한 가사만 뱉어내는 이 곡은 누군가가 열일곱들을 비롯하여 상처받은 이들에게 주는 조언처럼 느껴진다. 그는 ‘짖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시끄럽게 춤추고 노래하고 욕하는 이들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외떨어진 야생의 짐승들이 한참을 짖어야 잠에 들듯 ‘상처받고 낙오된’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지랄발광을 해야만 속에 있는 것들이 풀려서 겨우 잠에 들기 마련이라고. 누군가가 너의 뺨을 때리면 다른 볼을 숙여 대 주며 입 맞춰달라고 하란다. 씩씩대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그 누군가 역시 ‘상처받고 낙오된 짐승’에 불과하니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 곡은 지금의 검정치마가 이제는 다 아문 상처들을 만지작거리며 열일곱의 자신과 친구들 혹은 상처 많은 이들에게 조언하는 곡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얕게나마 살펴본 검정치마의 상처들이 아프지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어린양”이라는 곡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린양”의 가사는 검정치마가 1999년의 혹독한 여름밤과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꽤 다정하고 단단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처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그 상처가 긍정적인 방식으로 미래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린양”의 가사는 검정치마의 상처들은 충분히 그러했다고 느껴지는 가사다. 그러나 그 상처가 아름다워지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걸렸을 그이기에 그는 타인에게 상처주기가 꺼려졌으리라. 그 세월을 겪을 타인을 생각하여. 제멋대로인 것 같다가도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온기를 선사해주는 그의 목소리와 가사는 그런 마음에서 온 것이리라, 혼자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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