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린 나이트’(데이빗 로워리,2021)
(영화 리뷰에는 항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고편을 본 후 이 영화는 원작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의 충실한 영상 버전일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영화를 감상하면서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달았다. ‘그린 나이트’는 원작을 제대로 비튼 영화였다. 영화의 초반에서부터 기존의 가웨인과 영화 속 가웨인은 큰 차이를 보인다. 원작의 가웨인은 아서왕의 원탁의 기사들 중에서도 훌륭한 기사에 속하는 인물로 표현되나 영화 속 가웨인은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표현된다. 늦은 아침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고 기사가 되기에는 멀었다면서 자꾸 게으름을 피우는 인물이다. 녹색 기사와의 게임에 응하는 이유 역시 다르다. 원작의 가웨인은 좀 더 훌륭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 그와의 게임에 응하고 여정을 떠난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 속 가웨인은 그저 ‘멋진 무용담’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를 통해 명예를 얻고 싶어서 여정을 떠날 뿐이다. 심지어 영화 속 가웨인은 명예라는 것이 당신 인생의 전부냐는 질문에 삶의 전부까지는 아니라고 답한다. 자신의 전부도 아닌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게임에 응하는 어리석음이라니. 그런 가웨인에게 성주는 말한다. 이 여정 하나로 갑자기 용맹한 기사가 될 수 있는 거냐고. 가웨인은 성주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굴하지 않고, 아니, 질문 속의 날카로움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답하는 그런 인물이다.
가웨인이 드디어 여정을 떠나는 날 아침, 마을의 아이들이 뒤쫓아와 배웅하며 가웨인을 위한 검을 만들었다면서 장난감 검을 내어 보인다. 그러나 가웨인은 고맙다는 형식적인 말은커녕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원작에서 아이들의 기사로 불리던 가웨인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또한 가웨인은 거의 혼자 살아남은 듯한 아랫마을 소년에게 필요한 정보만 알아내고는 제 갈 길을 가려한다. 소년이 감사의 표시를 청하자 동전 한 닢을 무심히 던져줄 뿐이다. 한 여성이 안타까운 사연을 고백하며 자신의 머리를 찾아달라 부탁하자 머리를 찾아주면 자신에게 뭘 해줄 거냐고 물었다가 여성에게 질책을 받기도 한다. 원작에서 가난한 자들의 수호자라 불리던 모습과도 다른 모습이다. 이어 길을 가다가 마주한 신성한 여성 거인들에게 다짜고짜 불쌍한 나그네인 자신을 어깨에 태워 달라 소리친다. 이 장면을 보며 문득 가웨인과 여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극 초반에 여성들의 숙소 한편에서 잠을 자던 모습, 여전히 엄마의 영향 아래 있던 모습 등이 떠올랐다. 영화 속 가웨인은 오히려 여성들의 수호 속에 있는 연약한 인물이다. 여성들의 수호자로서 여성들의 기사로 불렸던 원작의 가웨인과는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녹색 기사와의 약속 장소인 녹색 예배당에 다 와갈 무렵 가웨인은 숲 속의 한 성에 도착하고 3일 간 머무르게 된다. 성주는 매일 낮이면 사냥을 나가는데 둘은 성주가 사냥에서 잡은 짐승과 가웨인이 낮동안 성에서 얻은 것을 교환하는 ‘획득물 교환의 시간’을 가지기로 한다. 가웨인은 성주가 사냥을 나간 때마다 성주의 부인으로부터 성적 유혹을 받게 되는데 가웨인은 그러한 유혹에 아주 쉽게 넘어간다. 연인 앞에서는 잘 못 세우던 그것을 성주의 아내 앞에서는 잘도 세우며. 원작의 가웨인은 획득물 교환의 시간에 성주의 부인에게서 받은 키스를(물론 원작의 가웨인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기사도의 예로서의 키스만 받았다) 성주에게 정직하게 돌려주지만 영화 속 가웨인은 그러지 않는다. 대신 어쩐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성주가 가웨인에게 입맞춤으로써 아내의 입맞춤을 가져간다. 원작의 가웨인과 영화 속 가웨인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그것은 셋째 날 성주의 부인이 준, 어떤 상황에서도 목숨을 보호해주는 능력을 지닌 녹색 허리띠를 성주에게 돌려주지 않았다는 점일 텐데 그러나 이후 둘의 녹색 허리띠와의 서사는 극명하게 다르다.
드디어 녹색 예배당 안, 도끼를 손에 쥔 녹색 기사 앞에 목을 내민 영화 속 가웨인은 목숨을 보호해준다는 녹색 허리띠를 몰래 두르고도 겁에 질려하다가 결국 부리나케 달아나 버린다. 원작의 가웨인 역시 녹색 허리띠를 몰래 둘렀고 도끼에 겁에 질려 목을 움츠렸으나 영화 속 가웨인과 달리 도망을 가지는 않았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살려준 녹색 기사 덕에 목숨을 부지했고 떳떳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왕 앞에 낱낱이 고해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영화 속 가웨인은 궁궐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닫고 왕위를 하사 받는다. 오랜 연인이 자신의 아들을 낳자마자 연인을 버리고 권위 있는 새 아내를 맞는다. 폭정과 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는다. 마을은 폐허가 되고 가웨인은 결국 적의 손에 목이 잘려 죽는다. 죽을 때까지 녹색 허리띠는 풀지 않았다. 원작의 가웨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참회하기 위해 녹색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면 영화 속 가웨인은 제 욕심으로 인해 내내 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장면의 전환이 일어난다. 가웨인은 다시 도끼를 손에 쥔 녹색 기사 앞에 엎드려 있다. 도망 이후의 장면들을 주마등처럼 마주한 듯한 그는 몰래 두르고 있던 녹색 허리띠를 풀어놓는다. 그리고 담담하게 목이 잘릴 자세를 갖춘다.
이 장면이 실제인지 도망 이후의 장면이 실제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결말이다. 그러나 나는 가웨인이 패망하는 결말이 실제이길 굳게 바랐다. 이어지는 쿠키 영상에서 가웨인의 딸인듯한 여자아이가 왕관을 쓰던 장면이 그를 뒷받침한다고 느꼈기 때문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렇게 불현듯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겹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니,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웨인이 꽤나 미웠기 때문인 것이 가장 컸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가웨인을 왜 이렇게도 미워하는가? 물론 영화 속 가웨인을 소위 ‘비호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영화 내내 가득했고 나는 그 요소들을 부러 원작의 가웨인과 비교해가며 네 단락으로 추려 썼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가웨인이 여느 악역들만큼 악랄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으름, 알량한 욕심, 어리석음, 무심함, 연약함, 유혹에의 굴복, 죽음에 대한 공포, 계산적인 태도 등을 악랄한 것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가웨인의 패망을 원할만큼 가웨인을 미워한다. 그 이유를 나는 헤세의 문장에서 찾았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우린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야.’(데미안)
가웨인이 그토록 미운 이유는 가웨인의 비호감적 모습들이 다 내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가웨인을 미워한다기보다는 가웨인을 통해 본, 내 안에 들어앉아 있는 부끄러운 면면들을 미워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가끔 거울에 비친 남루한 내 모습이 부끄러운 것과 비슷한 감정일까. 그렇다면 가웨인을 통해 나를 미워하는 나는 이어서 세상 모든 인간들을 미워해야 한다. 세상 모든 인간들이 비호감적 면면들을 안고 살지 않는가. 이때 Hozier의 ‘Take me to church’라는 곡에서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In the madness and soil of that sad earthly scene Only then I am human (세속과 광기의 슬픈 땅 위에서 그제야 나는 인간이 되고)’. 문장을 뒤집으면 인간이 곧 세속이고 광기라는 말이 된다. 세속 그 자체이기에 부끄러운 면면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고 슬프게도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운명대로 존재할 뿐인 우리 인간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많은 순간 미운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뿌리 끝까지 미워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인 이상 영웅이란 유토피아에나 존재하는 단어일 뿐인데, 어떻게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 속 가웨인과 같은 인물만을 인정하려 들 수 있을까. 거울에 비친 남루한 내 모습이 부끄러워도 거울 속 내 모습을 부정할 수는 없듯이 나는 더 이상 영화 속 가웨인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막 안아주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저 한 카페에서 가웨인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은 그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