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일기 - 한 우울증 환자의 토막 난 일기들
12월 26일
버스 의자에 앉은 나의 발이 동동 떠있다. 아이들은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못하고 동동 뜬다. 어릴 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땅에 발을 제대로 디디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3월 3일
수도꼭지 돌리는 소리가 히끅히끅 꼭 우는 소리 같아서
3월 9일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나를 잠재우는 데에는 아무런 기능을 해주지 못한다. 여태껏 수많은 책에서 읽었던 문장들 중 단 한 문장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태껏 들어온 수많은 노랫말들 중 단 한 문장도 나를 안정시켜주지 못한다.
3월 18일
탐색은 불안의 증거다. 불안하니까 자꾸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렇게 탐색이라는 행위가 익숙해지면 많은 것을 이해하는 정신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해가 곧장 기쁨과 평안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행위를 이해하지만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러니까 불안이 탐색으로, 탐색이 이해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맞을지 몰라도 아는 만큼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슬픈 일이다.
4월 11일
어렸을 때 놀이동산에 가면 꼭 회전목마를 탔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귀신의 집에 가기 싫은 사람은 회전목마를 타고 있으라고 하셨다. 귀신의 집이 무서웠던 나는 회전목마를 선택했다. 햇살 아래 돌아가던 회전목마는 나의 안식처였다. 어두컴컴한 실내와 자꾸만 나를 놀라게 하는 흉물들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회전목마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요즘 회전목마를 타고 있다. 단조롭고 평화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있다. 목마 바깥에 있는 두려움과 거치름을 피하여 목마를 꼭 붙들고 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던져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목마에 몸을 더 기대 본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는 목마가 안쓰럽지만 목마에서 손을 뗄 수는 없다. 어두운 실내에 들어갈 용기는 아직 없다.
4월 18일
나의 헛된 바람, 택도 없는 파라다이스,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에 대한 상상들이 햇살 아래 부서져 내린다. 햇살이 나의 상상의 허점들을 구석구석 비춘다. 상상 뒤에 숨어 있던 조악한 즐거움도, 민망함도, 허망함도 낱낱이 비춘다. 햇살은 참 해맑고 그래서 잔인하다.
4월 21일
생리 때문에 뻐근한 허리와 우릿한 아랫배, 조금 처지는 기분. 이 상태가 나의 본모습인 양 익숙하다. 아픔이란, 슬픔이란, 내게 지긋지긋하면서도 차라리 기쁨보다는 훨씬 익숙한 것이다.
5월 2일
가위에 눌릴 때면 귀신의 형상이 나타날 때보다 귀신이 언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른 채 떨고 있을 때 더 공포스럽다. 때로는 눈앞에 닥쳐 있는 것보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없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 때문에 더 큰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5월 9일
‘큰 집에서 사는 거다. 갈 방이 많은 것. 또는 없는 것. 당신과 층위를 달리해 자고 깨는 것.’
삶이 외로운 건 이 세상이 너무 넓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좁은 방에 혼자 있는 것보다 큰 집에 혼자 있는 게 더 외롭듯이.
5월 10일
존재만으로 유익한 존재가 있다. 예를 들어 나무가 그러하다. 원자재로써, 환경의 일부로서, 경제로서, 미로서 또 수많은 자격으로서 나무는 유익하다. 가만히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 그 존재를 다한다. 잠깐 억울해진다. 그저 태어나기를 유익하게 태어나는 존재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존재도 있다는 점이. 그러한 존재의 이름이 인간이라는 점이. 인간은 존재의 유익을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만 하는 운명이다. 불공평한 것 아닌가. 이상한 불평을 늘어놓아 본다.
8월 10일
꿈을 꿨다. 바다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를 걷다가 문득 울고 싶어졌다. 갑자기 울음을 주체할 수 없어진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를 벤치에 앉히며 자신이 잠시 다녀올 동안 진정하고 있으라며 다정히 말했다. 그 남자는 신이었던가. 나는 결국 내 삶을 구원받고 싶은 것인가.
10월 24일
아직도 모른다. 그렇게도 많은 불안을 겪어 왔으면서도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을 여전히 모른다. 겪어도 겪어도 모르겠다. 손 한 번 까딱이는 일조차 굼뜨게 만드는 불안 속을 여태껏 도대체 어떻게 헤엄쳐 나왔던 건지. 내가 헤엄쳐 나왔던 건 맞는지. 매번 제 풀에 지쳐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는 모양새로, 그렇게 불안을 지나왔던 것은 아닌지.
10월 25일
모든 계획과 설렘들이 문득 다 무의미해 보일 때, 그래서 내일의 의미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시곗바늘은 내일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내일로 가고 싶지 않지만 딱히 현재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을 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죽어도 싫을 때, 나는 생생히도 죽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