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일기 - 한 우울증 환자의 토막 난 일기들
7월 19일
뇌 안에 조절 장치가 있는 느낌이다. 너무 행복해진다 싶으면 불안을 분비해서 행복 수치를 떨어뜨리는.
8월 10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타나 나를 죽지 못하게 만드는 소중한 것들이 있다. 감사해할 줄은 모르고 그것들이 나를 희망 고문한다면서 비참해하는 못된 마음도 여기 있다.
11월 16일
‘하염없이’라는 단어가 있다.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상태로’라는 뜻이다.
나는 하염없이 산다.
12월 28일
술 탓이었는지 전후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그랬는지 노래를 듣다가 그랬는지 명확하지 않다. 시간의 순서도 모호하다. 아래로 쑥 가라앉는 것 같던 느낌만을 기억한다. 나는 왜 자꾸 평온한 일상에 파괴를 끌어올까. 왜 스스로 행복의 계단을 한 단씩 높이려 들까. 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힐까. 그게 왜 그리도 쉬울까. 언제나처럼 답을 찾지 못한 채 약만 타 왔다.
12월 31일
아직 낫지 않은, 혹은 이미 흉으로 남아버린 상처들을 가지고
간다
흉으로 남아버렸다 해도 괜찮다. 흉으로 남았다는 말은 어찌 되었든 지금은 다 아물었다는 말이니까.
1월 7일
이 질긴 밤에 붙잡을 대상이 휴대폰뿐이라는 것이 비참하다 해야 하나 우습다고 해야 하나. 붙잡고 있는다고 나아지는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휴대폰 불빛에 처절하게도 매달린다.
2월 3일
선생님은 나에게 너무 멀리 보지 말라고 말하셨다. 알면서도 잘 안되지만 그래도 큰 도움이 되는 말이다. 산뜻한 기분으로 나와 버스를 기다렸다. 콘크리트 바닥을 바라보다가 콘크리트 바닥 위로 내 머리가 산산이 깨어지는 상상을 했다. 이런 상상이 내 무의식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3월 8일
운동을 하다가 오늘 차를 타고 다대포를 지나던 중 ‘여기가 너 시험 쳤던 데 아니가.’라던 아빠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갑자기 우울이 몰려왔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어졌다. 표현은 안 했어도 아빠는 내가 공무원이 된 것을 많이 좋아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출근 첫날 받은 사원증을 가져가 몰래 사진을 찍어대곤 하셨으니까. 나는 그런 아빠의 기쁨을 고작 몇 달만에 도로 뺏어갔다. 뺏어간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자리에 슬픔을 채워놓았다. 새삼 죄스러웠다. 이 죄스러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내 손엔, 그러나 아무것도 없음을 너무 잘 알기에 한심해진다.
4월 12일
나의 일기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문장은 ‘나는 정말 우울증이 맞는 것인가’라는 의심의 문장이다. 오늘도 이 문장을 반복해야겠다. 나는 정말 우울증이 맞는 것인가. 병을 핑계로 그저 뒤로 숨으려 하는 건 아닌가. 하루 종일 슬픈 것도 아니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그러다가 한심해진다. 마음껏 아파하는 것조차 제대로 못하고 고통마저 의심하는 꼴이라니.
4월 13일
‘날 너무 미워하지 마’
내가 세상에게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람을 어려워하고 낯을 가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 사람이 혹여나 나를 미워하게 될까 두려워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표정 한 번 짓는 일이 어렵다. 미움받는 일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버려질까, 세모진 눈빛을 받을까 두려워하던 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4월 17일
내 마음은 늪
뭐 하나 들어오면 그대로 질퍽질퍽 삼켜버린다. 트램펄린처럼 튕겨 내보내거나 대리석 바닥처럼 산산이 깨뜨려버리지 못하고 자꾸 삼킨다. 유리조각이라도 부득부득 삼킨다. 하도 삼켜대서 목이 다 아프다.
4월 18일
폐차의 부품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에 대한 프로그램을 봤다. 하루는 사고로 많이 망가진 차가 들어왔다. 그는 망가진 차에서 쓸 만한 부품이 있을지 걱정했다. 나는 그 차에 타고 있었을 사람이 걱정되었다. 그는 슬픔의 잔해를 팔아 돈을 버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나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저 나는 망가진 차를 보고 사람이 아닌 차의 부품을 걱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슬펐을 뿐이다.
4월 20일
잔병치레가 잦으면 오히려 큰 병에 안 걸린다는 말이 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아닌 것 같다. 정신적으로 잔 상처가 많으면 그게 다 모여서 큰 병이 된다. 먼지 같은 것이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먼지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시커먼 때가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최대한 안 아픈 게 좋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지만 그게 진리도 아니다. 꼭 아파야 성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키가 클 때 성장통을 겪는 건 아니듯이. 모든 아픔에 배움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아픔이 찾아왔다면 가장 큰 눈물로 우는 게 낫다. 조악한 바느질로 상처를 꿰매는 것보다는 크게 크게 울거나 아물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 어설픈 봉합은 반드시 부작용을 몰고 온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게 문제이긴 하다.
7월 29일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는 채로 지나가는 인생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다. 살고 싶다는 열망도 죽고 싶다는 열망도 뚜렷하지 않다.
10월 7일
욕심이 생기는 게 무섭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나에게는 욕심이다. 집에 가서 이번 여행에서 찍은 아름다운 사진들을 다시 곱씹어야지, 다이어리에 예쁘게 정리해야지, 주변에 쫑알쫑알 자랑해야지, 내일은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셔야지, 뭐 이런 작은 기대와 설렘들. 이런 것들이 많아질 때면 외려 무섭다. 세상 일은 언제나 반대라, 그리고 너무 행복하다 싶으면 곧 기다렸다는 듯이 불행이 찾아왔던 경험이 많아서 무섭다. 자꾸만 이 아름다운 욕심들의 끝에 있는 것은 불행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서 욕심을 누른다. 설렘을 덤덤함으로 바꾸려 애쓴다. 다자이 오사무의 말대로, 그렇게 솜과 같은 행복에도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사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이런 욕심들이 많아질수록 자꾸 삶에 정을 두게 될까 봐, 가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