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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에는 크고 작음이 없음을

게임 ‘바이오쇼크 1’(2007)

by 권등대
나 앤드루 라이언이 묻는다.
인간은 자신이 흘린 땀의 대가를 주장할 수 없는가? 워싱턴 사람은 말한다. 없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 바티칸 사람은 말한다. 없다, 그것은 신의 것이다. 모스크바 사람은 말한다. 없다,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나는 그들의 대답을 거부했다.
나는 불가능을 선택했다.
나는, 랩처를 선택했다.

게임의 배경인 ‘랩처’라는 해저 도시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를 채택한 도시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는 어떠한 제재도 없는 곳이다. 예술가는 어떠한 도덕적 검열도 받지 않고 과학자는 ‘사소한’ 윤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이에 랩처는 초기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지만 결국 완벽하게 몰락하고 만다. 돈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앞지르는 랩처에서 한 번의 낙오는 곧 영원한 패배를 의미한다. 사유재산을 완전 존중하여 세금조차 걷지 않는 랩처에는 당연히 복지 제도도 없기 때문이다. 이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에 분노하여 일어난 하층민 계층의 반란으로 랩처는 폐허가 되었다. 이제 랩처에는 시체와 ‘아담’에 미친 괴물과 ‘리틀시스터’만이 가득하다. ‘아담’이란 DNA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물질로 랩처의 사업가 ‘폰테인’이 아담을 주사기를 통해 주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손쉽게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모두가 아담을 원하게 되었고 종내는 아담 중독상태에 이르러 아담만을 갈구하며 사람을 공격하는 괴물들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또한 폰테인은 아담의 공급량이 부족해지자 새 공급법을 고안해내는데 그것은 고아원의 여자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여자아이들에게 최면을 걸어 거리에 널린 시체의 혈액 속에 남아 있는 아담을 채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인공 ‘잭’ 역시 랩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아담이 필요한데 그러는 도중에 수많은 리틀시스터들을 만나게 된다. 리틀 시스터를 만날 때마다 잭 입장의 플레이어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눈앞의 리틀시스터를 죽여서 플레이의 필수 요소인 아담을 채취할지, 아니면 ‘구원 초능력’으로 리틀시스터를 구원하여 평범한 아이로 돌려보낼지. 이 선택은 이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면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 플레이 내내 잭을 도와주던 인물은 사실 폰테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폰테인은 잭을 이용해 랩처를 완전히 정복하려 한다는 것. 잭은 랩처의 창시자인 앤드루 라이언의 아들이었고 라이언의 라이벌로서 랩처를 정복하려는 폰테인은 잭을 비장의 카드라 생각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강제 발육 및 최면을 강행한 것이었다. 잭은 “Would you kindly(부탁인데)"라는 구절이 붙은 말을 들으면 그를 거부할 수 없도록 최면이 걸려 있었고 이에 폰테인이 무전을 통해 이 구절을 반복하여 게임 내내 잭을 이끌었던 것이다. 자신을 죽이라던 라이언의 부탁에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을 느꼈던 것도 이 최면 때문이었다. 잭은 이제 폰테인과 맞선다. 최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뒤 마지막 대결을 펼치지만 엄청난 양의 아담을 주사하고 있는 폰테인에겐 역부족이었다. 결국 잭이 죽음을 예감하고 쓰러져 있던 그때, 리틀시스터들이 나타난다. 그녀들은 주사기로 폰테인의 몸에서 아담을 모조리 빼내어 폰테인을 죽인다. 폰테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들의 손에 처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리하여 잭이 랩처의 주인이 될 수 있게 되었지만 잭은 그 자리를 거절하고 다른 길을 택한다. 바로 잠수정을 타고 리틀시스터들과 지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잭은 리틀시스터들이 빼앗겼던 한 가지를 찾아주었다. 그것은 ‘기회’이다. 배울 기회, 사랑할 기회, 살아갈 기회. 그리고 잭은 그녀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맞는다.


잭이 랩처의 주인 자리를 마다한 이유는 무엇인가. 리틀시스터에 앞서 배울 기회, 사랑할 기회, (제 뜻대로) 살아갈 기회를 빼앗긴 것은 다름 아닌 잭이었다.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납치되었고 강제 발육으로 인해 몸만 급속도로 큰 탓에 아무런 추억이 없었다. 빈 추억의 자리는 최면과 거짓 가족에 대한 거짓 세뇌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리틀시스터들의 사연에 동질감을 느꼈으리라. 그리하여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리틀시스터들이 자신처럼 사람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기회들을 완전히 빼앗겨버리기 전에 얼른 손에 쥐어주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꼭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잭이 그와 같은 사연이 없는 사람이었을지라도 아마 리틀 시스터의 삶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해 가지는 연민으로 말이다. 이것은 모든 것이 가능한 도시였던 랩처에 없었던 유일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해피엔딩은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플레이 중 리틀 시스터를 죽이고 아담을 채취하는 선택을 이어가면 배드 엔딩을 맞게 되는데 딱 1번 죽이는 것만 허용되고 두 번 이상 죽이면 해피엔딩은 맞을 수 없도록 설정되어 있다. 한 번 정도는 게임 플레이 중 있을 수 있는 실수로 쳐주는 것이므로 한 명을 죽이는 순간 배드 엔딩이 된다고 보면 된다. 이에 대해 아무리 그래도, 랩처를 구하려다 아담이 필요해서 딱 두 명 죽였을 뿐인데 너무 가혹하다는 투정 어린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설정은 대의라는 명분으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설정이다.


여기서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이 영화의 급박한 결말 장면에서 주인공 오필리아가 판의 부탁대로 동생을 바늘로 딱 한 번만 찔러서 피 한 방울만 판에게 주었다면, 오필리아는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허락하지 않았다. 판의 입장에서도 관객의 입장에서도 답답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단호했다. 그것은 이미 이 세대는 전쟁으로 너무 많은 피를 흘렸으므로 다음 세대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게 하겠다는 단호함이었다. ‘바이오쇼크 1’의 단호함 역시 비슷한 것이다. 단 한 번의 희생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함. 리틀시스터를 한 명 죽인 일은 백 명 죽인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희생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므로. 심지어 그 희생이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에도 용납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한 희생은 대개 숭고한 것으로 받들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대의와의 크기 비교를 통해 비교적 작은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바이오쇼크 1’은 그러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인일 뿐이라 이야기한다. 이는 답답한 것도 가혹한 것도 아니다. 당연해야 하는 진리다. 조금 힘들지라도 리틀시스터를 한 명도 죽이지 않아도 끝까지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것은 희생이 대의의 당연한 요소가 아니라는 점까지 이야기한다. ‘바이오쇼크 1’의 모든 것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값진 요소는 바로 이러한 단호함이다. 나는 이를 너무도 강조하고 싶어서 ‘바이오쇼크 1’의 다른 많은 훌륭한 메시지와 세밀한 세계관과 줄거리 등을 이리도 단순하게 요약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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