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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Mar 20. 2023

책에 대한 애매한 사랑

책과 나의 작은 궤적

아주 먼 옛날부터 자기소개를 위한 종이에 꼭 빠지지 않는 취미 난에 주야장천 독서를 써내었던 나이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온 편은 아니다. 작가들을 많이 아는 편도 아니고 유명한 작가들도 그 이름과 대표작만 아는 경우가 태반이다. 머리가 그다지 비상한 편도 아닌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서 아무리 저명한 책이라도 어려워 보이면 손도 대지 않고 편독도 심하다. 그런데도 학창 시절 내내 동아리는 무조건 독서 동아리로 선택했던 것은 독서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지 책을 유별나게 좋아해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언젠가 ‘책사모 -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동아리 명을 부담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사랑까지야. 그냥 손에 집히면 읽는 정도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는다. 영향은 받을 수 있어도 180도 바꿀 수 있기까지야 할까 싶다. 그래서 책에 대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웬일인지 글이 평소의 배로 길어져 있었다. 책과 관련된 기억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퇴고를 하다 깨달았다. 나 나름대로 책을 꽤 좋아하는구나.


책과 관련된 첫 번째 기억은 엄마의 책들을 탐내던 어린 내 모습이다. 나와 언니의 방에 있던 책을 죄다 읽고 나자 눈에 들어온 것이 엄마의 책장이었다. 엄마의 책장에 자리한 책들은 그때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하나를 빼내어 읽기 시작했다. 불임 판정을 받은 한 여성이 기도의 힘으로 괴로움을 이겨낸다는 내용의 기독교 서적이었다. 내용 역시 그때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난해했다.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여성의 모습에 공감하기에는 너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읽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감의 어려움과 긴긴 문장들은 곧 지루함으로 이어졌고 나는 그 자리에서 깜빡 잠에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자 외출에서 돌아온 엄마는 나에게 이런 건 어른들이 읽는 책이니 읽으면 안 된다고 혼을 내셨다. 나는 오히려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어른들이 읽는 책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유쾌한 첫 기억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책의 노란 표지가 눈앞에 선명할 정도로 짙은 기억에 해당한다. 엄마의 높은 원목 책장과 그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책들, 그리고 그 책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미지의 아우라까지도 선명하다.


욕심이란 게 딱히 없었던 어린 내가 처음으로 어떤 것을 욕심내는 일이 생겼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어린 왕자』를 소개하면서 이 책은 지금 읽는 감상과 중고등학생 때, 대학생 때, 그리고 더 나이가 많이 들었을 때의 감상이 다 다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보통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던 나였지만 선생님의 말에 이 책은 꼭 소장해서 평생에 걸쳐 읽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6학년 시절부터 시작해 약 3년에서 5년 단위로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정말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졌다. 대학 졸업 후 어린 왕자를 읽었을 때, 그때서야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가장 선명한 대목은 술꾼과 어린 왕자의 대화 부분이다. 술꾼은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려고 술을 마시고 있다. 어린 왕자가 무엇이 부끄럽냐고 묻자 술꾼이 대답한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럽지!” 어른이 되기 전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기억에도 없던 대목이었는데 이제와서는 가장 뼈저린 부분 중에 하나가 되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술이나 마시고 있는 내 신세가 부끄러워서 다시 술로 그런 나를 잊으려 한다는 술꾼이 너무나 익숙한 것은 왜일까. 지금도 내 눈앞에 꽂혀 있는 이 책이 이후의 나에게는 또 어떤 감상을 남길지 모르겠으나 부디 내가 코끼리를 삼킨 뱀 그림을 보고 모자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중학생 시절, 어느 날 서점에 갔다 온 아빠는 엄마에게 책을 한 권 건넸다. 다음 날 엄마는 당신은 이런 책은 안 본다며 나에게 투덜대셨다. 궁금해하는 나에게 엄마는 그 책을 건네주셨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던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책의 이름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였다. 이 책을 읽고도 울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슬펐고 그만큼 그 책에 몰입했다. 나는 작가의 이름을 잘 기억하여 작가의 또 다른 책을 찾아 읽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외딴방』은 『엄마를 부탁해』와는 다른 의미로 나를 감동시켰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펜을 잡는 주인공의 모습과 자꾸만 내 몸 저 아래를 울리는 문장들은 나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었다. 특히 다음 대목이 그러했다.


“그러니까 작가가 되겠다는 거니? (…) 그런 사람들은 다르게 태어나는 것 같던데?”
나는 외사촌이 그러니 너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고 할까 봐 조바심치며 좀 더 말한다.
“다르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다르게 생각하는 거야.”


비슷한 시기에 나는 한 친구로부터 작가를 꿈꾸는 게 어떻냐는 조언을 들은 참이었다.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꼬박꼬박 상을 받아왔고 글도 꾸준히 쓰고 있으며 책도 좋아하는 편이니까. 나는 남들은 다 있는 멋들어진 장래희망이 없다는 사실에 남몰래 위축되어 있던 참이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설레는 마음에 그럴까, 하고 대답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고 글솜씨가 특출 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 대목을 읽었고 내 안의 어떤 것이 반응했다. 그 어떤 것은 목소리를 내었다. ‘작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생애 첫 꿈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생애 첫’이라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수식어를 단 것이 끝까지 함께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고등학교 진학 후 담임 선생님과의 첫 면담 시간, 선생님은 희망직업 난에 적힌 ‘작가’라는 글씨 위에 아무렇지 않게 슥슥 엑스자를 치고는 이런 거 말고,라고 말씀하셨다. 뜻밖에도 딱히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의 면담은 애써 모른 척해왔던 나의 진실을 정면으로 확인한 시간이었다. 진실은 이것이다. 나는 작가를 먹고사는 직업으로 삼을 자신도, 그만큼의 열정도 없었다. 창작대회들을 알아보고 정리하면서도 막상 참가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부모님께 대학을 문예창작과로 진학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 혼자 끄적대던 글은 차고 넘쳤지만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보여준 적도 없었다. 그냥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좋았을 뿐이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게 된 그날 이후 나는 내 꿈을 확실히 놓아주었다.


하지만 책 자체를 놓을 수는 없었다. 책을 놓을 수는 없는 채로, 하지만 꿈은 잃은 채로 살아가던 어느 날 학교 방과 후 수업 수강 신청에 실패하여 얼떨결에 듣게 된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을 통해 K선생님을 만났다. 어느 날 K선생님은 시 몇 편을 복사한 종이를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이 시들은 사실 시험에 나오는 시들은 아니다. 하지만 너희와 함께 읽고 싶어서 들고 왔다.” 선생님은 그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시를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의 수업은 내가 막연히 꿈꿔온 수업이었다. 아름다운 시들을 오롯이 만끽할 수 있었던 그 수업시간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생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 중 하나가 되어 있다. 선생님은 내가 한때 꾸었던 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 준 사람이고 비록 그 꿈은 놓더라도 책은, 문학은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첫 번째 사람이다.


두 번째는 이상(李箱)이다. 고등학생 시절의 어느 날 휴대폰을 뒤적이다 발견한 공짜 e-book 무더기에서 내 눈에 띈 것은 이상의 「날개」라는 소설이었다. 가끔 나는 특정 단어에 이유 없이 끌리곤 한다. 일례로 파수꾼이라는 단어가 그러하다. <파수꾼>이라는 영화를 보게 된 것도,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게 된 것도 순전히 파수꾼이라는 단어에 이유 없이 끌렸기 때문이다. 그날의 나 역시 날개라는 단어에 이유 없이 끌렸다. 그리하여 읽게 된 소설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 없는 도입부와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는 문장들이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삶에의 의지가 없이 무력한 주인공은 처음이라 놀라웠다. 그러나 더 놀라웠던 것은 ‘가능하다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주인공에게 어느새 깊이 공감하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 사이 한두 줄씩 나를 찌릿 울리는 문장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이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이 문장은 내 속에 존재했으나 문장이 되지 못한 채 돌아다니던 어떤 것을 정확하게 옮겨놓은 문장이었다. 나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시간이 지나 문학 시간에 「날개」를 다시 접했고 시를 새로 접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에서 가리키는 ‘천재’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이상에게 점점 더 빠져들어 선집을 넘어 전집을, 전집을 넘어 논문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후 유독 많이 반복하여 읽게 된 이상의 수필이 있었는데 「행복」이라는 수필이 그것이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로 세 바닥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분량의 수필이고 제목과는 달리 아주 불행한 내용이다. 이 수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개인적이다. 한창 공시 공부를 할 때였다. 언젠가부터 불안이 찾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심장이 뛰었고 손금을 타고 땀이 흘렀다. 시야가 떨렸다. 그때 대처법으로 삼은 게 이상의 「행복」을 집어 들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짧다는 이유로, 슬프다는 이유로 무작정 읽은 것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읽다 보면 불안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도 많이 읽어서 앞부분을 다 외울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이상의 「행복」은 그 당시 나에게 있어 주기도문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을 그저 우러러볼 뿐이다. 감히 이상처럼 쓰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러러보는 작가이지만 이 작가가 내가 겪는 고통의 이름을 정확하게 짚어줄 때, 나만 앓고 있다고 생각한 병의 이름을 진단해 줄 때면 이 사람이 나의 단 하나 이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하여 나는 오른팔뚝에 한자 두 개를 품고 살게 되었다. 오얏 리(李)와 상자 상(箱). 적어도 나에게는 평생이라는 타투의 속성에 맡기기에 충분한 두 글자다.


읽고 쓰는 일은 나의 중요한 취미로 미뤄 놓자, 그래도 책과 최대한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자, 어떤 직업이 그러할까,를 생각했을 때 문득 떠오른 건 사서라는 직업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무작정 수시 원서에 문헌정보학과를 써내었고 대학에 진학했으며 결국 사서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서로서의 몇 달은 내게 다짐과 결심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막연한 꿈은 막연한 현실만을 보여주었다. 내내 책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행복해지질 않았다.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온 자리에서 나는 그저 읽었다. 그 당시에 내가 읽은 책들은, 배수아의 표현에 의하면, ‘나의 불안이 읽은 것’이었다. 그 당시 읽은 책의 대표는 천희란의 『자동피아노』,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다.


저는 서로 속이면서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간이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끝내 저에게 그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알았더라면, 저는,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거나,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테지요. 인간의 생활과 대립하며, 밤마다 지옥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테지요. (『인간실격』)


살을 에고 속부터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문장들은 내가 아니라 나의 불안이 읽은 것이었다. 나는 방구석 의자에 앉아 가만히 섬이 된 채 읽고 또 읽으면서 아파했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하지도 친밀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아파했을 뿐이고 그렇기에 위로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플 때는 최대한 크게 아파하는 게 낫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아가 힘껏 아프고 또 아파하는 사람만이 나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당시에 이 책들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는 힘껏 아플 수 있도록 해 준 이 책들에 감사하다.


책 읽기는 어느덧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되었다. 취미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어가고 있다. 기억하는 순간마다 책은 내 곁에 있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은 시간도 비슷할 것 같다. 나의 행복한 상상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이 아름다운 서재를 갖는 상상인데 이는 내가 책과 함께하는 미래를 자연스레 그리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책을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고루고루 읽지도, 다독을 하지도 않고, 여러 작가와 출판계 소식 등에 빠삭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궁금해하고, 답지 않게 욕심내고, 꿈꾸게 되고, 최대한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고, 나조차도 불가해한 나를 이해받고, 힘들 때면 매달리고,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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