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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Feb 17. 2023

아니, 그 정도는 아니구요 …

애매한 것들을 위한 서(書)

인터넷을 떠돌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상태인 듯한 어떤 분이 쓴 짧은 글을 마주했다. 직업이 아닌 다른 수식어들로 자신을 소개하고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그분은 말했다. 멋있는 말이었다. 좋았어, 나도 따라 해 봐야지.


… 그런데 나는 도저히 뭐가 없다.

좋아하는 것, 하고 있는 것은 많다. 그런데 그것들이 딱히 본격적이지가 못하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걷기 운동을 하고 있어요.”

- 와, 부지런하셔라. 많이 걸으세요? 걷기 동아리 같은 것도 관심 많으시겠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일주일에 두세 번, 한두 시간 정도예요. 그나마도 귀찮다는 이유로 안 나가는 경우도 많구요, 낯을 하도 가려서 걷기 모임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어요.”


“LP 모으는 걸 좋아해요.”

- 와, 옛날 노래 많이 아시겠다. LP 많이 모으셨어요? 집에 턴테이블도 있겠네요?

“아니… 그렇게 잘 알진 않고 맨날 듣는 것만 들어요. 돈이 쪼달리기도 해서 모은 LP도 스무 장 정도밖에 안 되고요, 턴테이블은 쿠팡에서 제일 싼 걸로 하나 겨우 샀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해요. 북스타그램도 몇 달째 운영하고 있어요.”

- 와, 한 달에 막 열 권씩 읽고 그러세요? 팔로워도 많으시겠다! 프란츠 카프카 좋아하세요? 총균쇠 읽어 봤어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구요… 한 달에 많이 읽어봤자 서너 권, 팔로워는 50여 명… 인기 없어요. 프란츠 카프카는 어려워서 잘 못 읽고 총균쇠는 너무 두꺼워서 무서워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내 대답에 아- 하면서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맞은 편의 그를 마주하는 나.


작금은 취미와 자기 계발의 시대다. 특히나 뚜렷한 직업이 없는 상태인 사람은 어떻게든 취미와 자기 계발 거리를 마련해야만 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취미와 자기 계발 ‘이라도’ 해야 하는 그런 분위기다. 게다가 그 취미는 꽤나 본격적이어야만, 그리고 ‘양적’으로 꽤 몸집이 있어야만 인정을 받기 마련이다. 내 거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며칠 띄엄띄엄 휘갈긴 일기보다는 정돈되고 예쁜 글씨체로 매일같이 쓰인 일기에, 알록달록한 스티커로 매일 정성스레 꾸며진 일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한 달 동안 책 한 권을 진득이 읽은 사람보다는 한 달 동안 읽은 책으로 책탑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이 더 긍정적인 눈빛을 받으며 일주일에 두세 번 걷는 사람보다는 일주일을 빠짐없이 걷는 사람에게 ‘부지런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붙는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양이 곧 그것에 대해 쏟은 시간이고 이는 곧 그것에 대한 진심이니까. 그래서 전자에 속하는 나는 좀 주눅이 든다. 돈 버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일도 그리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것만 같다.


그런데, 그래서, 진짜 내가 하고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가?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고 있는 것들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걸까? 나는 지금 아무것도 아닌 건가? 이도저도 아니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바쁘게 살고 있는데.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직업도 없고 본격적인 취미도 에피소드도 없어 보여도, 그래도 나에게는 분명히 내 나름대로 쌓아온 일들과 그에 수반한 이야기들이 있다. 거기서 어느새 나름대로 깊이란 게 만들어져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보려고, 또 감히 소개해보려고 한다. 굉장히 엉망진창이고 너무도 가벼워서 읽는 사람이 다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는, 나의 취미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아주 아주 가끔은 역사가 오래된 깊푸른 바다보다 패인지 얼마 되지 않은 얕은 연못이 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는 믿음으로, 감히 세상 모든 애매한 것들을 아주 조금 대변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가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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