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현재나 과거를 살지 않습니다.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 나 자신을 봉사시키고 있습니다. (…)
임종의 침상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체험해 보지 않은 시간대, 현재에 머무는 겁니다. 미래로부터 처음 해방되는 현재, 이 순간에 사유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과거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역류하죠. 기억이 역류하는 겁니다.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 김진영, 메멘토, 2019
유서란 ’미래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없을 미래에 존재할 이들에게 남기는 글이니까. 그러나 김진영 철학가의 위 글을 읽고 유서는 그 어떤 글보다도 ‘현재적인 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임종의 침상 위에는 당연히 미래가 없다. 그리고 현재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사유의 대상은 현재와 과거가 전부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쓰인 글 역시 그렇다.
선생님은 나에게 너무 멀리 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었다. 나는 자꾸 나무 너머 숲을 보다 못해 한 대륙을 보고 지구를 보고 우주를 보았고 그럴 때면 우주만큼 절망했다. 지나치게 넓은 시야는 외려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을 선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순간, 지긋지긋하게 넓은 이 시야가 드디어 좁아지는 것을 체감했는데 그 순간은 뜻밖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머릿속으로 임종의 침상에, 임종의 난간대에 올랐을 때, 그 순간에 나는 ‘미래 살기’를 중단했다. 지금 내 눈코입에 들이차는 감각들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곧 머릿속은 과거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니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의 소녀처럼, 과거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는 동시에 뛰는 발바닥의 느낌이 선명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고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이 선명했다. 완전한 현재의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다짐했다. 하루에 한 장씩 유서를 쓰자.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한쪽에는 긴 과거를, 한쪽에는 미래 따위 없는 완전한 낭떠러지를 지닌 땅 위에 두 발로 서자.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현재에, 현재가 떠올리는 과거에 집중해 보자.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언젠가 숲 정도만 보고 살 수 있어지지 않을까. 아니, ‘언젠가’의 더 나은 나를 기대하는 것도 미래의 문법일 뿐이다. 일단은 지금의 나를 위해 쓰는 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