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제2쪽
“최승자는 시에 순교했어요.” (『극지의 시』, 이성복)
어느 날 불현듯 시집들을 왕창 사고 싶어졌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시집을 사고 싶었다. 그러나 아는 시인이 없었다. 최근에 읽었던 시화(詩話) 『인생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무작정 펼쳤다. “(…) 이 시집이 특히 뛰어난 것은, 모진 말이지만, 그가 다른 어느 시집보다도 바로 이 시집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시집의 이름은 『즐거운 일기』였다. 그렇게 최승자 시인의 시를 뒤늦게 읽게 되었다.
이 시집에는 비유로써의 고통이 없다. 말뿐인 고통이 없다. 시인이 직접 말한 바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이 시집을 가득 채운 고통은 비유로써의 그것이 아니다. 콘크리트와 같은 그것이다. 이 시집에서 유독 짙은 감상을 주는 시가 있다. 앞서 인용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가 그 시이다. 왜 진작 이 시집을 읽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마저 들게 하는 시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대가 나를, 내가 그대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대의 몸과 마음은 그대의 것이고 나의 몸과 마음은 나의 것이다. 어쨌거나 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밥을 씹어 삼켜야 하고 어쨌거나 내 슬픔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 사랑이 밥 먹여주지 않고 사랑이 대신 눈물 삼켜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콘크리트 벽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누군가를 위해서 죽는 것이 누군가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어떻게든 사는 것이다. 살아서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무참히 꺾여지는 그날을. 몸이 분질러지고 팔다리가 꺾여 꽃병에 꽂히는 그날을. 최악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한다. 무참히 꺾일 그날을 위하여, 살아가기 혹은 죽어가기.
그러므로 슬픔은 조금이나마 기꺼운 것이 된다. 슬픔은 “죽음을 향해 한 발 더, 기운차게 내딛“을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조금이나마’다. ”수십억의 군화처럼“ 행군해 오는 이 세계, 이 세계의 공포를 감당할 수 없는 때가 더 많은 나는 이 세계와 세월의 밑바닥을 고요히 기어 다니는 다족류의 벌레가 되어버리곤 한다.(「무제 2」) 그러나 나의 생은 지독한 위장이다. “토해놓은 내장”을 도로 삼키고 “이쁜 플라스틱 살로” 가린다. “죽을 때까지 당신들을 교묘히” 속여왔을 것이다. 가끔 “나의 외알 안경이 실수로 한 번쯤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실수를 메우려 더욱 속이기에 열을 올렸을 것이다.(「고백」) 그렇게 속이고 또 속이다가 더는 속일 수 없을 정도로 내 몸이 무참히 분질러졌을 때, 그때에야 당신은 이 유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