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제4쪽
그 이후 한 번도 듣지 않았던 노래를 틀었다. 사실 듣지 못한 것에 가깝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틀었다. 우려했던 대로, 그때 그 시기가 무슨 한 세계처럼 내게 다가왔다.
추운 겨울이었고 나는 첫 직장에서 첫 주를 보내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기만 하면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1이 되어 눈칫밥을 먹던 일주일간 새내기 직장인들이라면 흔히 겪는다는 경미한 우울을 겪고 있었다. 그 시기 퇴근 후 집으로 오는 길에 꼭 그 노래를 들었다. 친구가 추천해 준 곡이었다. 이제 나의 어둠은 내가 밝힐 거라고, 누가 나를 비춰주길 바라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노래였다. 스스로 번지며 차오르는 어엿한 만월이 되겠다고. 그 노래를 들으면 이미 내가 어엿한 만월이 된 것만 같았다. 어떤 어둠도 내 스스로 밝혀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미했던 우울은 꽤 심대한 우울로 바뀌었고 바깥의 추위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절망 때문에 위아래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떨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온몸이 한계라고 외치는데도 외면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그 외면의 몇 달이 필요 이상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직장 첫 주에만 그 노래를 들었는데 왜 그 이후에 겪었던 기억들이 그 노래와 함께 오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온다. 한 세계처럼 온다. 드라마 속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옛날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마주하고 갑자기 두통을 느끼면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찾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정말 뻔한 그 설정은 드라마 속에나 있는 클리셰가 아니라 아니라 현실에 정말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노래가 불러일으키는 그 몇 달의 우울이 너무 큰 몸집으로 나를 누를 때, 의외로 눈물이 흐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무언가에 압도될 때는 눈물조차 나지 않는 법이니까. 그저 압도될 뿐이니까. 매일 같이 마주하던 출근길의 지긋지긋한 샛별들, 내겐 담배 연기보다 독했던 사무실 공기, 택시에 연체동물처럼 몸을 퍼뜨린 채 퇴근하던 밤, 어느새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던 상처 내기, 속이 부르트느라 손이 부르트는지도 몰랐던 그 겨울의 얼얼한 공기. 그런 것들에 그저 압도되었을 뿐이었다. 화창한 대낮이었는데도 눈 뜬 채로 악몽을 꾸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악몽의 하이라이트는 나의 저 우울감들이 아니었다. 노래를 추천해 주던 친구의 해맑은 웃음이었다. 취직 축하 선물을 전해주던 화사한 늦가을날, 함께 들른 작은 책방의 책 냄새였다. 미안해, 미안해, 울부짖으면서 악몽에서 간신히 깨어났다. 노래가 끝나 있었다.
음악이 인간 정신의 절정이라는 말에 빌어먹게도 완전히 동의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음악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때론 너무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너무 많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독한 향수라 할지라도 음악은 손쉽게 불러들일 수 있다. 음악만이 부릴 수 있는, 때론 너무 잔인한 마법이다. 그런데 언젠가 죽음을 생각했을 때 뜬금없이 이 노래가 떠올랐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왜 하필 이 노래가 떠올랐을까. 한 시인의 글을 읽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때의 나에게 있어 나의 죽음이란 결코 자연사가 아니었다. 그러한 이는 자신의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면 더 편안히 떠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 노래로 지옥을 불러오려고 했던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의 내가 다시 생각해 본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노래는 무엇인가. 다행히 그 노래를 떠올리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