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제5쪽
유서에는 좀 특별한 이야기들이 쓰이기 마련이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혹은 하지 못했을 이야기들. 누구든 생의 끝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문득 내 가장 일상적인 생각들을 유서에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길 마지막 글은 그 어떤 글보다도 나 자신을 잘 나타내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내 가장 내밀하고도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내 유서의 독자에게도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내겐 술에 취해 반복하여 중얼거리는 말처럼 반복해서 되뇌는 문장들이 있다. 오늘은 그 문장들로 유서를 쓴다. 나를 이루는, 혹은 나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장들로 짤막한 유서를 쓴다.
1
죽고 싶은 마음은 칼을 찾는데* 울고 싶은 마음은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이상, 「침몰 沈歿」
울고 싶은 마음을 가진 상태란 울음도 눈물도 전혀 차오르지 않는데 그냥 막 울고 싶은 때다. 무언가 답답하여 주저앉아 울고 싶은데 눈물샘은 바싹 말라 있을 때. 울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고 싶은 마음은 칼이라도 찾을 수 있는데 울고 싶은 마음은 도대체 찾을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답답한 채로 막혀 있다. 작은 함에 갇힌 것 같이.
2
나, 단 한 번도 탐탁지 못했던 인간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아구아 비바』
살면서 내가 가장 탐탁지 못하게 여겼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음을. 나는 나에게 너무도 각박하고 엄격했음을. 단 한 번도 나 자신을 향해 고개 끄덕여주지 않았음을. 나는 나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았는지.
3
사선에서
직선과 묘하게 비껴서 그어진 사선. 나는 항상 그 위에 서 있다. 남들과 한 발짝 동떨어진 곳에. 끝내 좁혀지지 않는 한 발짝의 거리에 매번 절망하곤 했다. 사선 위는 유독 춥기 때문에.
4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사라져 마땅한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늘 고민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5
살 수 있을까.
내 가장 근본적인 의문.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그냥 내가 살 수 있을까 의문인 것이다.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6
인생은, 소음과 분노가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적어도 나는, 생은 시끄럽고 비극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 말하는 이 문장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가장 아프고 정확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7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 이상, 『날개』
세상의 모든 문장을 다 지우고 단 한 문장만 남긴다면 나는 이 문장을 남길 것이다.
나를 다 지우고 단 한 문장만 남긴다면 나는 이 문장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