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시간이다.
군고구마와 구운 계란 그리고 연무우 자박물김치...
날 때부터 부실했던 신장을 위해 특별히 담근 레몬청 주스에서 김이 오른다. 중년 넘은 신장건강에 레몬이 그리 좋단다.
햇살도 입동이 지나면 성냥팔이 소녀가 되는 걸까?
마당을 건너온 햇살이 남쪽창 아래에서 노크도 못하고 서성거린다.
들어와.
햇살이 곁으로 올 때까지 혼자만의 브런치를 즐기면 되는 나,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해지기까지 겪었던 수많은 갈등.
갈등의 끝은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자고 결심하고 행동한 후부터다.
아버지에게 배운 행복해지는 비법은 너무 단순했다.
내 의지 작동을 적극적으로 멈추고 주어지는 모든 것에 항복하는 삶.
군고구마 하나를 들어 올려 껍질을 깐다. 뜨겁다.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른 껍질 속에서 탈출한 검갈색 구수함이 식탁 위에 깔린다.
가장 비싼 음식을 음미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고구마 속살 한 입 베어먹는다.
“엇뜨거라. 뜨거, 뜨거.”
비싼 음식은 나 몰라라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온다. 행복한 비명이다.
연무우 자박물김치 한 숟가락 서둘러 떠먹는다. 얼얼한 혀가 진정이 된다.
이번에는 구운 계란 하나를 들어 껍질을 깐다.
어릴 적 구들방의 아랫목처럼 한쪽이 꺼멓게 탔다.
열을 견디며 습도를 다 뺏긴 후 끝내 갈라진 장판처럼 두어 갈래 균열이 졌다.
내 아버지의 손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좋은 브런치 메뉴.
정말 지겨워.
언니와 함께 생활하던 사춘기 무렵에는 꼬딱지만한 방 한쪽에 겨우내 쌓여 있던 고구마 가마니 곁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놀러 오면 가마니를 열어 고구마 한 바가지 꺼내는 어머니.
어머니가 나가고 나면 온 방을 점령했던 흙에 절은 생고구마 냄새가 마치 연탄가스 같았다.
정월이 가고 냉기 속에 온기가 묻어올 때면 가마니 깊은 곳으로부터 썩어가는 고구마 냄새는 또 어땠는지.
헌 신문지가 발린 천정을 올려다보며 내 어서 커서 이 감옥같은 고구마방을 탈출하리라.
그런 생각을 했을 때는 그 좋던 아버지에 대한 불만도 고구마 넝쿨처럼 실겅실겅 올라오곤 했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저렇게 바보같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을까?
그리곤 아버지를 따라 고구마밭으로 가며 행복해했던 더 어린 날을 세차게 흔들었던 적도 많았다.
늦은 가을이면 바지게 가득 짚가마니를 얹어 고구마를 캐러 가던 아버지.
나도 아버지 옆구리에 바짝 붙어서 지겟다리 하나 꽉 붙잡고 쫄랑쫄랑 따라가곤 했다.
고구마밭에는 이랑이랑 넌출이 덮여 있었다.
밭 한 쪽에 지게를 내린 아버지는 낫을 들고 넝쿨을 걷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낫이 지나간 이랑은 숱 많은 머리를 삭발한듯 민머리가 되었다.
어머니는 빈 이랑 사이사이에 가마니를 놓았다.
나는 아버지의 낫에 베인 넝쿨이 무더기 무더기 쌓이는 곁에서 넝쿨 끝밟기 놀이를 했다.
괭이맹키로 촐싹거리제? 아부지 일하는데 귀찮구로.
그래도 아버지는 미소 지을 뿐이었다.
고학력자였던 아버지는 성적도 최상위여서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건만 농부가 되었다.
장남은 태어난 곳이 어디든, 가세가 어떻든,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철학이었다.
전수하고 전수받는 것은 특별히 대우받는 직종이 아니어도 꼭 이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일을 할 사람은 타고나야 하는데 할아버지의 농업을 전수받을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 했다.
그런 아버지가 사춘기가 되자 그만 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나는 끝내 미워할 수 없었다.
기억 속에 갇힌 아버지의 추억에서 아버지가 농부라는 것 외에는 미워할 그 어떤 것도 건져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아리게 그리운 것이 달걀에 얽힌 추억이었다.
요즘과 달리 그 시절 농촌에는 농한기가 있었다.
봄에 모를 내고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나면 보통의 아버지들은 마을 사랑방에 모여 화투 놀이를 즐기거나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 추운 겨울에도 막노동판을 찾아 일을 하셨다.
똘망똘망 넷이나 되는 새끼들은 공부를 곧잘 하였다. 아버지의 어깨는 그래서 무거웠다.
마침 마을 건너 산 위에 골프장이 지어졌다. 아버지는 맨 앞장 서서 노무자로 신청을 했다.
아버지가 골프장에서 하루 종일 삽질을 하는 날이면 어머니의 시선은 늘 앞산으로 가 있었다.
저녁밥을 지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닭장에 가보래이. 알 낳아 놨을끼다.
닭장으로 들어가는 내 감정은 희비가 교차했다.
계란은 최고의 음식이었고, 우리집 닭들이 낳아주는 계란은 내게 돌아오기엔 멀기 때문에 슬펐고 아버지가 있어 일말의 기쁨도 있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라 닭이 몇 마리 되지 않아 하루에 너댓 알 낳는 달걀은 맞은편 집에 사는 할아버지댁으로 건너갔고 우리 집에는 하루에 한두 개가 고작이었다.
엄마, 계란찜 해 주끼가?
건네는 계란 한 알을 냉정히도 받으며 어머니는 말했다.
이거는 아부지 약이다.
밥을 퍼는 내내 떠나지 않는 나를 흘기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밥그릇에 계란을 깨어 넣었다.
깊숙한 주발 반 쯤 뜨거운 밥을 퍼고 가운데 계란을 깨어 넣고 그 위에 또 밥을 얹는 것이었다.
밥그릇은 작은 담요에 둘둘 말려 우리가 자는 이불 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깜빡 잠이 들라치면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어머니는 우리들의 발을 살살 비집고 담요에 말린 밥그릇을 들고 나갔다.
나는 이미 기대하고 있었다.
대충 씻고 온 아버지가 밥그릇을 열어 수북한 고봉밥을 몇 술 뜨고 나면 밥이 납작해졌는데 어머니는 얼른 양조간장 한 숟갈과 참기름 반 숟갈을 밥 위에 부어 주었다.
그때부터 내 기대는 침이 되어 흘렀다.
뜨거운 밥과 함께 섞이는 계란과 참기름과 양조간장 향이 온 방 안을 맴돌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부지, 나 여기 있어.
예나 지금이나 텔레파시는 통하게 되어 있다.
내가 보내는 SOS를 느낀 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이 가시나가 또?
나는 이불을 벗고 아버지의 무릎 위로 기어올랐다.
어머니가 흘기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커다란 밥숟갈 끝에 계란으로 비빈 밥 한 덩이를 얹어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계란은 아낌없이 주는 껍질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기가 찬 맛이 되어 다시 기다려주었으므로.
이른바 구운 계란쌀밥이었다.
쌀을 미리 불려놓았다가 빈 계란 속에 넣고 소죽을 끓인 후 열기가 남은 재 속에 파묻어서 익힌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당신께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인 계란의 껍질 안에 매일 아침 불린 쌀을 채워 구워주셨던 것이다.
번잡하던 조직생활에서 벗어나 시골살이를 선택한 것과
마당 한 쪽 빈터에 닭장을 지은 것과
웬만한 야채며 식재료를 직접 재배하게 된 건 어느새 나도 아버지를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답습하는 것.
그건 전수받을 자격이 있는자만의 몫이다.
업종이 무엇이든, 가세가 어떻든.
내일은 계란쌀밥을 한 번 구워볼 요량이다.
“꼬끼오!”
마당 끝 구석에서 수탉이 목을 놓고 울어댄다.
참 때를 모르는 녀석이다. 시간이 몇 신데 저리 울어댈까.
그러나 곱디고운 녀석이다.
싱싱한 유정란과 계란쌀밥을 만들 껍질을 보시한 생명이 아니냐.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고운 추억을 소급해 준 보석들이 아니냐.
아니, 아니. 그 무엇보다 소소하나마 우리 아버지의 농부 정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온 몸으로 증명해 준 하늘들이 아니냔 말이다.
“꼬꼬댁 꼬꼭꼭꼭.”
그러면 그렇지.
암탉 소리가 이어지는 걸 보니 방금 두 녀석, 불타는 사랑을 나눈 끝이렷다.
“아버지! 누가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 했을까요?”
홀라당 껍질이 까진 계란을 들어올리며 아버지께 물어본다.
아니 보고한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의 업을 물려받았어요. 촌부가 되었다구요.”
“그래? 행복하냐?”
“그럼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뭔가 큰 의미를 남겨야 한다며 아득바득 살았는데요. 그게 다 허망한 욕심이었어요. 제가 하늘로부터 받은 달란트는요. 아버지처럼 사는 것이었어요.”
“자알했다. 니가 이렇게 살 줄 내 진즉 알았지.”
거실을 건너온 햇살이 어느결에 내 무릎에 올라와 있다.
가만가만 햇살을 쓰다듬는다.
“근데 아버지. 제가 아버지 닮아 살 줄 어찌 아셨소?”
“내도 니맹키로 모르는 거 빼고 다 알지로. 니 사주나 내 사주나….”
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