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6

제1장 무녀의 길(4)

by 취중진담


발행일 2025.10.13 pm8:00


<전편노트>

무당이 되라는 어머니 월녀를 피해 바닷가로 나온 채선.

멀리 염정수를 긷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집 떠날 결심이 흔들리는 자신을 괴로워하고.


제 1장 무녀의 길(4)


금파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띠살문 구석구석에도, 잘 다듬어진 정원 담장에도 어둠은 골고루 스며들고 있었다.

“대체 어쩌시려는 건지요, 나리.”


재효의 방문 앞에 선 금파의 얼굴에도 어둠은 검서리가 되어 덮여있었다.


“벌써 며칠 째 그러고 계시는지요.”


콩기름 잘 먹여 반질반질한 창호지를 바라보며 금파는 손가락을 세어 하나 둘 꼽아나갔다.


닷새째나 되었다. 주인은 닷새째 해가 떠도 떴는지, 달이 져도 졌는지 도무지 기척이 없다. 안방의 초상을 치른 후 그림자마냥 들어가서는 저리도 꼼짝을 않고 있는 주인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들이는 밥상은 밥상보도 들추지 않은 채 되돌아나오고 있다.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셔요, 나리.”


참말 부지런한 주인이었다. 횃대에 올라앉은 암탉이 깃을 털면 그 누구보다 머저 일어나 사랑채 우물로 나가던 주인이었다. 잠귀밝아 금파는 새벽마다 그 소리를 들었다. 동백이파리 사이로 들려오는 걸음은 밤하늘을 가르는 구름처럼 고요히 중문 밖 우물에서 멈추었고, 곧 두레박 내리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겉치레를 다 벗어던진 알몸처럼 또렷한 소리였다. 그럴 때 금파는 자리를 털곤 했다.


아침 안개가 진하구나.


단정하게 차리고 안 채 중문을 걸어나오면 주인은 사랑채 우물가에 서서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혼잣말인 듯 건넸다. 새벽 달빛에 바친 모양산 산금처럼 은은한 음성이었다.


예. 오늘은 날이 쾌청하겠어요.


그러나 주인의 눈길은 자신의 얼굴이 머물지 않고 어깨를 스치곤 내쳐 중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래. 지난 밤엔 마님 숨소리가 좀 편안하시더냐?


편안한 지 안 한지 숨결을 챙겨볼 마음조차 없었다는 대답을 하진 못했다. 아니, 숨소리를 챙기기는커녕 잠이 든 내내 이제 그만 죽어주시오, 제발 죽어주시오, 한 시라도 서둘러 죽어주시오 기도했다는 소리를 차마 하진 못했다.


“일어나셔요, 나리.”


애끓는 마음을 가슴깊숙이 밀어놓은 금파는 달빛 젖은 문고리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아니야. 만사 때가 있는 법이지. 주인의 마음을 흔들어 빈자리를 차지할 때가 아직은 아닌 것이다. 남들은 여복 많다 하기좋은 말들을 수군거리지만 정작 당신의 박복함을 주인은 그리도 한탄하였다. 넘치는 모자람만 못하니. 적당한 때를 기다릴 일이다. 그리하여도 이렇게나 상심하여 두문불출이니 야속한 마음이야 숨길 길이 없는 금파였다.

나 죽거들랑… 니가… 금파 니가 영감을….


거친 숨소리를 추슬러 남편을 부탁하던 망자의 음성을 애써 떼쳐내며 금파는 쥐어뜯듯 동정깃을 움켜잡았다.

주인은 청무같이 새파란 스물여섯 나이에 첫 번째 부인을 잃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돌아가신 노영감께서는 아들의 충격을 덜어주려 서둘러 재취를 시켰다고 들었다. 타고난 팔자였다. 재취부인마저 잃었고 다시 두해가 지나 삼취를 했는데 딸 아이 하나 남기고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매파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부친 때부터 해왔던 관약방 일로 고창 고을을 지나려면 지금도 주인의 땅을 밟지 않고선 지날 수 없는 재력이 매파들의 줄을 잇게 했을 것인즉, 매파들은 궁궐같은 이 집의 동서남북 어느 문으로 들어온지도 모르게 들어와 집안 한가운데 연지정 앞에서 주인과 맞딱뜨리곤 했다. 주인은 매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곤 집을 나섰다. 그 마음 알 길이 없으나 어떤 땐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돌아오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곧 흉흉한 소문이 모양산 기슭을 훑고 내려왔다. 고창 관약방 외아들이 하룻밤에 기생 서른을 끼고 놀았다는 소문이었다. 지전으로 서른명 기생의 몸을 도배해준다는데 술 한 잔에 육신을 던지는 들병이도 있고, 관찰사 노리개로 따라온 장안 기생도 있었으며, 어느 관찰사와는 구멍동서라는 기생도 섞여 있었다는 소문이었다.

괴행을 잠재운 것은 엉뚱하게도 우연히 만난 사내였다. 사내의 정체를 아는 이는 없으나 그로 인해 주인은 집으로 돌아왔고, 어찌된 일인지 동리정사 사랑채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리꾼들이었다

어느날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연지애기씨의 설사가 멎질 않았기에 좋은 약이란 약은 다 달여 먹였지만 효험이 없었다고 한다. 주인은 축 늘어진 어린 딸을 업고 스스로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아비 박복하니 어미도 없이 자라는데 냉한 속까지 물려주어 툭허면 배앓이를 하니 여간 안쓰럽지가 않구나.

주인은 어린 딸을 업고 사랑채를 서성거리며 죽은 아내를 불렀는데 그때 처녀 하나가 장짓물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화사하면서도 맵시 고운 자태를 지닌 처녀의 손에는 대바구니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대바구니 속에는 검고 빛나는 가지가 한 가득이었다. 주인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죽은 세 번째 아내인 연지어미를 그대로 빼다박은 것 같았다고 했다.


영감님… 이거 연지 애기 달여먹이세요. 설사에 좋대요.


다음날 처녀가 준 가지달인 물을 먹은 연지는 거짓말처럼 설사를 멈추었다. 그런 인연으로 유모가 된 안방은 참으로 지극정성이라 했다. 생모보다 더 연지를 아낀다는 치사가 주변에서 미어졌다. 열 살이 되어 돌봄기간이 끝났을 때, 돌아가려는 처녀를 연지가 잡았다. 가지 말라고, 내 엄마가 되어 달라고 치맛자락을 잡고 우는데 차마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했다.

금파는 알았다. 그때 처녀를 잡고 싶었던 사람은 실은 주인이었을 거란 거.

헛헛함을 채워주기에 처녀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차마 입을 떼지 못했는데 자신의 품에만 들면 여지없이 죽어나가는 경험 때문이었다.

어느날, 연지를 돌보던 처녀가 먼저 말을 해왔다. 이대로 영영 연지의 어미가 되고 싶다고.

참 금슬 좋았다. 앞서 보낸 세 아내의 좋은 점만 뽁뽁 뽑아 닮은 사람이었다. 이생 영영 함께 하고자 했다는 말을 금파는 주인에게서 들었다.

그랬던 사람이 또 병으로 누웠을 때 주인은 안방에 잇닿게 방을 하나 내어 금파를 거처케 했다.

니가 저 사람을 수발해 다오.

그것은 은혜였다. 믿는다는 증거였다. 정월 대보름날 윷가락처럼 이놈의 손에서 저놈의 품으로 오가던 자신을 거두어준 것만도 뼛가루를 갈아 바쳐 보은할 일인 것을, 꽃같은 안방을 보필하는 역할까지 맡겨주었으니 백골이 산화하여 한 줌 흙이 되어서도 이 집을 위해 썩으리라 작정했더랬다.


이제 안방은 곧 내 차지야.


그만 욕심이 넘쳐버렸던 것이다.


“주인님, 어여 일어나셔요, 어여.”


금파는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모양산 봉우리에 걸렸던 해가 우뚝한 치미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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