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7

제 1장 무녀의 길(5)

by 취중진담

발행일 2025.10.20 pm8:00


<전편노트>

어릴 때부터 소리를 하였으나 기생에 버금가는 삶을 살다 동리정사 수습소리꾼으로 들어온 금파.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한 캐릭터라 동리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될 계획을 세운다.


동리


뒤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그레한 안개만이 자욱할 뿐이었다. 재효는 두 팔을 휘저으며 안개를 걷으려 애를 썼다.


임자!


부르기만 하면 늘 곁에 있었던 듯 나타나던 아내가 보이질 않았다.


임자! 어딨는 게요?


심상찮은 상황임이 분명했지만 어떤 상황인지 짐작되진 않았다. 아무도 없느 공간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만 확실할 뿐 무엇하나 선명한 게 없었다.


이 사람 정연이!


지점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커다란 날개 하나가 후드득 날아올랐다. 발밑에선 사그랑 사그랑 사르랑게가 기어다녔다. 출처와 계통을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전신을 휘감아왔다. 재효는 밀려드는 공포감을 떨치려 애를 쓰며 발하나를 들었다. 꼼짝하질 않았다. 무엇인가 발목을 단단히 잡고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발 하나를 들어 올렸다. 조임이 더해왔다. 사특한 꾐에 빠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소년처럼 두려웠다.

조임은 발목을 타고 점점 위쪽으로 올라왔다.


이것 보게! 나를 좀 풀어주게.


버둥거릴수록 옥죄임이 심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버둥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붉그레한 안개 속에서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생겨났다. 물방울은 파르르 떨면서 다가왔다. 뭔가 큰 불안이 그 속에 들어있는 듯 해서 재효는 외면했다. 그러나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시선이 물방울에 집중되었다.

물방울은 커다랗게 변해서 재효의 눈앞에서 멈췄다. 물방울 속에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다. 눈이 부릅떠 졌다.

놀랍게도 자신이었다. 벌레만큼 작아진 자신이 물방울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뒤척이며 죽어가고 있었다.

아, 내가 죽는구나. 내가 죽어가고 있어.


그러자 해야할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소리를 배우겠다고 대문 앞에 줄을 서는 이들을 거두어 소리청으로 보내야 하고, 그들의 득음을 도와 세상속으로 내보내야 하며, 곧 다가올 아버님 기제사도 모셔야 한다.

집 밖에도 일은 산재해 있다. 연잇는 가뭄으로 기근에 허덕이는 고을 사람들을 위해 고창천변에 보도 몇 군데 만들기로 했는데 관아에선 일을 제대로 진행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올 정월 대보름엔 오거리 당산제를 떡 벌어지게 치르기로 했으니 그때 공연할 판소리도 완성해야 하는데 세종은 그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챙겨도 봐야 한다.

그때였다. 물방이 파르르 떨더니 점 같은 물방울이 수천 개, 수만 개 생겨나서는 큰 물방울 주위를 에워싸곤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눈이 부셨다. 재효는 손등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큰물방울 속을 보려고 애를 썼다. 이저저리 이지러지다 자지러지던 자신이 어느 순간, 물방울을 푹 뚫고 튀어나왔다.


으악!


정장 나온 것은 재효 자신이 아니라 노랗고 붉은 꽃으로 장식된 고깔이었다. 놀랄 사이도 없이 고깔밑으로 사지가 없는 형체 하나가 주르르 빠져나왔다. 뽀얀 갑사저고리에 풍성한 치마를 두른 그것이 외씨버선코를 내밀고는 다가왔다.


누, 누구요!


고깔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오지마! 오지 말라고!


그때였다. 갑사치마밖으로 나온 버선코 끝에서 하얗고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호르륵 날아올랐다. 재효는 저도 몰래 나비를 향해 다가갔다.

나비의 눈 속엔 눈물인 듯 물기가 그득했다.

내가 너를 어찌해 주리?


순간, 나비가 파르락 날아오르더니 허공에서 무엇인가를 휙 내동댕이쳤다. 여자였다. 여자는 허공에서 부딪치고 깨지다가 뻘밭으로 곤두박질쳤다.


안 돼!


재효는 뻘밭을 뒤집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뭉텅이가 불룩불룩 솟구쳐 올랐다. 여자는 점점 빠져들었고 솟구쳐오른 뻘덩이가 재효를 덮쳤다.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때였다. 어디선가 선선한 바람 한 자락이 불어왔다. 재효는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바람자락 위에 뉘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 선생님!”


아득한 바람의 결 사이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선생님?”


둘, 셋, 넷….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얼굴들이 뿌연 시야 밖에서 둥둥 떠 있었다. 재효는 뿌연 시야를 걷으려 팔을 들었다.


“그냥 계십시오, 영감.”


얼굴 중 하나가 불거지듯 앞으로 나왔다. 흐린 시야 속에서 보이는 얼굴은 소리청 선생 김세종이었다.

“다행입니다. 이렇게라도 정신이 돌아오셨으니.”


김세종 뿐 아니었다. 날치를 비롯한 소리청 창자들이 누런 상복을 입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방금 어딜 갔다 왔던가. 죽었던가? 재효는 다시 눈을 감았다.

상여가 보였다. 상복을 입은 소리청 창자들이 띠를 매었고, 세종이 요령을 잡았다.

북망산천이 어디메뇨. 내 집앞이 북망일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을 일러주오.

세종의 구성진 목청이 앞소리를 매기자 소리청 창자들이 뒷소리를 받았다.

너화너화 너화너. 너이가지넘자 너화너.

그렇구나. 내가 죽었었구나. 헌데 뭐하러 또 살아났단 말인가. 감은 눈꺼풀을 뚫고 눈물이 흘렀다. 살았어. 살았으면 이대로 무너질 순 없지 않은가. 짧은 순간 재효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보게 세종.”


“예, 영감.”


“배가 고프구만.”


“아이고,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김세종이 고개 돌려 뒤에 선 금파를 보았다. 눈빛을 받은 금파가 재효를 향해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그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모두 돌아들 가게. 금파가 죽을 쑤어오면 내 먹을 것이니.”


김세종이 뒤에 앉은 제자들을 손짓해 밖으론 내보냈다.

“자네도 돌아가게.”


“영감….”


세종이 머뭇대다 소맷동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뭔가?”


“어렵겠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아무튼 영감께서 직접 보셔야 할 듯 합니다.”


재효는 천근 쇠덩이같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질좋은 종이로 만든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읽어보시지요.”


“두고 나가게.”


“그럼.”


속지를 꺼내려다 도로 넣은 세종이 나갔나 했는데 어느새 금파가 들어와 있었다. 놋그릇 두 개가 얹힌 개다리소반을 든 채였다. 수더분하지만 어딘가 야심찬 저 얼굴. 재효는 묘한 금파의 기운에 눌리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애써 털어내었다.


“함초죽을 좀 쑤었습니다.”


하필이면 함초라.

재효는 방금 전 혼미한 죽음 속에서 보았던 뻘밭 가득했던 함초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들고 나가라.”


“나리.”


“내가 기운을 차리면 너에게 선물을 줄 것이야. 그러니 지금은 들고 나가라.”


재효는 돌아누웠다. 미동도 하지 않는 금파가 숨막혔다.


“이 년은 나리를 스승으로 뫼신 후 처음으로 사람인가 싶었습니다.”


“무슨 소릴 하려는 거냐?”


금파의 나직하나 굳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핫바지 같은 노래나 부르며 사내들 가랑이 핥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일하는 만큼 먹여주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나리십니다.”


“그래서?”


“그래서 동리정사에 뼛가루를 묻으려 했습니다. 죽으라면 죽겠다 생각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려는 건지 묻고 있질 않느냐?”


“그러니 이 년을….”


재효는 돌아누운 채 고개 돌려 금파를 보았다. 단단한 입술이 파르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리는 조금 전 제게 선물을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랬다.”


“주십시오.”

“말을 해라, 그게 뭔지”

“저를 보내주십시오.”

“보내줘? 어디를?”

“저를 한양으로 보내주십시오. 그 분의 뜻을 거스리지 마십시오.”


재효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세종이 두고 간 봉투를 빠르게 열었다.

봉투 안에는 흥선의 친필 편지가 비단실에 감겨 있었다.

next...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6화장편소설<소릿고>#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