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될 수 없는 참견

by 당구와 인간

그새 낯선 빌딩이 버섯 자라듯 높다랗다. 하늘 감추기 바쁜 콘크리트의 위용을 조개가 부러워해야 할지. 푸르름 옅은 서울 하늘아래 자동차와 사람들이 빌딩숲을 헤집고 다닌다. 마치 태엽 풀린 초바늘 같다. 삭막함에 발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숨어봐야 버섯 아래다. 힘겹게 숨 쉴 공간에 도착하여 한 움큼 공기를 들이켜 본다. 지친 몸 달래려 밤낮을 마다할 수 없었던 시절의 기억들. 한낮의 뙤약볕을 피해서, 매서운 비바람이 불어도, 눈 내리던 날도 어김없이 찾았던 여기. 함박눈 내리던 새벽길에 홀로 발자국 남길 때가 엊그제인데.


마천루가 감싸는 이곳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인공호수다. 아름답기로 이만한 호수가 또 어디 있을까. 팔뚝만 한 향어와 금붕어가 첨벙거리고 고즈넉한 둘레길을 걷노라면 숲 속 새들의 지저귐에 발걸음마저 가벼워진다. 옛적 기억을 끌어와 숲길을 일부러 더듬어 본다. 저 멀리 즐겨 앉던 나무 의자가 어서 오라며 손짓한다. 먼지 털어 낼 새 없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건너편 놀이동산에서 함성이 울려 퍼지자 새들도 언제나처럼 장단 맞추며 노래 부른다.


사방이 차도로 엉켜있어 한 발짝만 벗어나도 매연이 코를 찌른다. 그래서일까, 벗어나기 싫은 이곳은 도심 속 오아시스다. 산책로는 늘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벤치에 앉은 연인들의 속삭임이 그칠 새 없다. 소나무 숲 볕뉘가 동화 같은 그림을 연출하자 장막 속에 묻혀 사색을 즐기려는 생각들이 춤춘다. 셀 수 없이 드나드는 너와 나의 생각들, 저마다의 사연을 끄집으며 다가올 시간을 그려간다. 밤이면 술병이 눈살 찌푸리지만 이 또한 사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려니.


고층 빌딩에서 내려오는 생각들도 나름의 사연 속에 호수를 머금을 테다. 경관을 품은 거만함이라도 개의치 않는다.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거다. 누구도 적막함을 깨트리지 못한다. 쓸쓸함을 지키려는 모습이 덤덤하기까지 하다. 물고기도 고요함을 즐기는 듯 빨강, 노랑, 알록달록 곳곳에서 자태를 뽐낸다. 속내는 치열한 경쟁 속에 먹고 먹히는 관계의 연속일지라도.


나는 왜 여기에 앉았고 너는 왜 이곳을 찾는 것일까. 경쟁 속에 떠밀려 내려앉고 올라앉는 세상살이. 그 속에 내가 있을 곳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 없다. 각자의 몫을 쟁취하기 위해 운명 속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 노력과 용기를 충전시키는 사람들. 다들 스스로를 지키며 오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노숙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 처지가 그들을 담고 있었는지 모른다. 딱 한 사람씩 보였다. 사라졌다 싶으면 새로이 나타나고 또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추운 겨울 빼고는 시시때때로 목격했던 것 같다. 어쩌다 이곳까지 찾았을까. 먹다 버린 음식과 화장실의 더운물 때문이지 않을까. 눈앞에서 안 보이면 어김없이 건너편 휴지통에서 서성거렸다.


연명하는 모습을 조심스레 쳐다본다. 내일이면 휴지통에 음식이 기다리기 때문일까, 지키고 오르려는 의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아시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호숫가의 노숙자들. 배를 채우고 한뎃잠을 자며 씻지 않고 갈아입을 필요도 없다. 사회라는 울타리에서 관계가 필요 없는 사람들과 부딪쳐야 하는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물어본들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유난히도 볕이 따가운 가을날 누군가 내가 찜해둔 자리에 누워 있다. “눕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무색할 정도로 코까지 곤다. 먼지 잔뜩 묻은 파카에 시커먼 수염과 숯검정을 바른듯한 피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부터 출현한 노숙자로 눈빛을 두어 번 마주쳤던 사이였다. 휴지통을 뒤질 때 한 번, 오가며 한 번, 부끄러움을 의식했던 느낌이었다. 지적 장애도 아닌 것 같았고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 멀쩡한 사지를 두고 무슨 사연이길래.


한 바퀴 두르고 나니 잠에서 깼나 보다. 대자로 걸터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다. 주위 빈자리도 없길래 슬그머니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힐끔거리는 모습이 나를 안다는 눈치다. 쿰쿰한 냄새를 참으며 슬며시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안 춥냐고 물으니 옅은 미소만 건네준다. 정적이 끊길 새라, ‘왜 이런 곳에서 이렇게?’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잠시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대뜸 침 튀기며 소리친다.


"xx! 넌 왜 그리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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