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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없는 질문

by 당구와 인간

쪽지를 발견했다. 그 속에 무엇이 씌었는지는 모른다. 펼쳐 본 것까지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환희에 찬 모습으로 선생님에게 달려갔더랬다. 칭찬받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내게 준 보물은 무엇이었을까. 숲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던 긴장감과 쪽지를 찾았을 때 희열감은 아직도 생생한데 보물의 기억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갓 초등학교 때 일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산다는 것’에 대한 요리법이 궁금했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직감할 뿐 어떻게 만드는지 몰랐다. 사회와 어른들에게 물어보는 당연함을 요구했지만 그 질문을 여태껏 하게 될 줄이야. 어른들은 항상 그럴싸한 글귀를 끌어와서 질문을 설득하려 했지만 모호성으로 뭉뚱그렸다. 싱거우면 소금을 더 넣는다든지, 좀 더 익히면 구수하다, 뭐 이런 원론적인 답변들이다.


답답한 마음은 책을 어른이라 생각하며 답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부정적 수사와 기교라는 수초를 제거하면서 바다 밑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요리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임에 분명했다. 무한한 요리법이 숨어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발견했지만 수초를 완전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궁하면 책을 읽으라는 결론으로 자의적 강요를 받으면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남아있는 허전함을 떨쳐 버리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경험상 개발도상국 상업 사회는 단 두 가지 방법으로 레시피를 제공한다. “공부해라.” “한 가지 기술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다.”라며 말이다. ‘먹고사는 것’과 ‘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동기부여와 의미부여로 실천되지만 둘 다 쉽지 않은 일임엔 분명하다. 물론 결합했을 때 가장 맛있을 거라 상상되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있긴 있을까.


누구나 먹고사는 것에서 자유롭다. 심지어 광화문의 노숙자도 감옥의 범죄자도 마찬가지다. 산다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은 좀 더 잘 먹고 좀 더 게으르고 싶은 욕심 때문이지 않을까. 게으른 욕심을 은근슬쩍 감추면서 대부분 그 욕심 때문에 위안과 희망 등의 잡다한 msg를 첨가하여 입맛을 달래려 한다. 걱정 없는 자연스러움이 한없이 부럽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피 다른 연, 형제의 희생, 가족의 불운, 장애 등 의도치 않은 직간접적 경험들 때문이다.


어쩌면 답이 없는 질문을 애써 찾으려는 것은 아닐까. 가끔 노숙자들이나 히피족을 동경하는 상상도 해보지만 이내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비움을 끌어와도 먹고사니즘이 앞서기에 초라함이 앞선다. 남 눈치 안 보고 내 멋대로 사는 삶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쉽게 풀어낼 수 없는 질문은 분명한 것 같다. 어른이 된 이 마당에 행여 누군가 ‘산다는 것’을 물어온다면 뭐라고 답해줘야 하나.


내 속의 ‘나’를 찾는 것이 아닐까. 마치 어릴 적 ‘보물찾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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