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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2. 2023

전설들

당구장에서 ~ 10

역사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시간의 구속을 던져버리고서 그저 묵묵히 가던 길을 갈 뿐이다. 틈새마다 사사의 원동력으로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면서 말이다. 누구나 배움을 얻고 그 기술을 보유하게 된다. 습득한 지식을 연마하고 창조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전수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있는 나.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서있는 너는 무엇인지.


호기심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게 만든다. 기량의 한계를 극복하고픈 동력을 얻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백 년을 훌쩍 넘겨버린 한국의 당구문화에서 그 영역을 살펴보는 일은 내게 있어 치는 것 못지않은 흥미로움이다. 시대마다 내로라하는 전설들의 흔적이 차고 넘쳐나지만 보고 실천하는 즐거움이 앞서기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영역이기도 하다.


PC방이 없던 시절 부산에서의 일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느 때와 달랐다. 백발의 노인네가 직접 수기한 당구 교본을 들고서 당구장을 찾았다고 한다. 공을 몰아가면서 당구대 한 바퀴를 돌리고는 사라져 버렸다나. ‘세리를 정말 잘 친다더라.’ ‘실력이 장난 아니더라.’ 무협지에서나 읽을법한 소문들이 한때 곳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만나고픈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잊히려면 소식을 건네주는 뜬금포 같은 인연이다.



궁금한 세월은 고인이 된 후에나 알아채 버렸다. 당구 원로 김한기다. 만약 한국에 명예의 전당이 있다면 분명 앞선 서열에서 후배들을 지켜보며 응원했으리라. 그는 왜 여러 당구장을 배회했을까. 단지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다녀가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토록 연구했던 당구 비법을 누군가에게 전수하려 하지 않았을까. 나의 후계자를 위해, 못다 한 야망을 대신하기 위해서 말이다. 품고 있던 비법을 모으고 모아 합체된 하나의 길로 기량이 뭉쳐지는 당구 기술의 역사. 이는 곧 세월의 흔적이기도 하다.


예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부산이나 마산 쪽은 당구 잘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울과 전라도가 아닌 변두리 지방에서 왜 뛰어난 기량의 보유자들이 출현했을까. 항구가 있어 우선 접할 수 있는 조건이라지만 설득력이 좀 모자란 느낌이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경성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이 부산에 정착한 이유가 크지 않을까. 해방 후 중국동포들이 합류함으로써 기교가 더해지고 다듬어진 역사의 흐름이다.


어쨌든 당구가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사사의 출발점은 순종의 당구코치 전상운에서 비롯되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가 누구에게 당구를 배웠는지는 모른다. 추측해 보건대 조계지의 호텔 구락부에서 어깨너머로 기량을 다듬지 않았을까. 그의 제자는 김효근이다. 한국인 당구장 ‘무궁헌’에서 독립운동권 학생들의 연락책이었다고 한다. 애국 활동이 발각되어 종로경찰서에 2개월간 투옥하며 고문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프랑스혁명처럼 시절의 밀담이 당구장에서 오갔던 것 같다. 라디오도 한참이 지난 후 전파를 탔으니 말이다. 곳곳에 당구장이 생겨나자 한량들 틈에서 구국 동지들이 정사를 도모하지 않았을까. 해방되자 만주국 총리 돤치루이의 개인 코치였던 최용. 상해에서 카바레를 경영하던 김창섭. 선양에서 활동하던 박수복 등 해외파들이 귀국하였다. 이들에 의해 국내선수들과 뜻을 모아 ‘대한당구 선수회’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새롭게 다져진 당구문화는 다음 세대가 주역을 맡으며 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구계의 전설 "이리 꼬마 전광웅"의 출현으로 판도가 변해버렸다. *최초로 개최된 스리쿠션 선수권대회 우승과 사구 선수권까지도 우승을 차지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한일 당구대회 개최는 전설들의 등용문과 마찬가지였다. 동호인들의 입김에 오르내리며 한일 축구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것 같다. 예술 당구는 코털 마술사 김상윤이 명성을 떨쳤으며 스리쿠션은 인간 로봇 이상천과 이어서 개구리 김경률이 탄생하게 되는 시대적 배경이다.


80년대는 지금과 다른 당구문화였다. 밥벌이가 시원치 않아 기껏해야 내기 당구가 전부였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사사의 방식도 돈내기를 위한 형태였다. 이를테면 개인 큐를 사용하지 않고 빗자루 몽둥이를 쥐고서도 쳐낼 수 있어야 했다. 어리숙하게 보이면서 상대의 주머니를 털어버리는 직업적 본능은 당구뿐만 아니었다. 화투에서 카드로 넘나들며 호구(虎口)들의 눈을 홀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암울한 기억들.


시대를 풍미했던 **‘작대기’들은 사부의 존재감 자체를 잊으려 했을 정도였다. 거친 시절이 지나자 당구도 도박도 스포츠로 변모하고 있다. 당구는 공식 상금으로 승부욕을 부추기고 있고 도박은 한방 없는 확률의 심리전으로 품격을 높이려는 모양새다. 당구만 열심히 친다면야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긍정의 확률로 우승을 점쳐보게 되었으니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내게도 스승이 있었다. 그립지만 소식 찾을 길 없다. 공 하나로 밤새우며 졸리면 큐 품고 당구대 위에서 코 골던 기억들. 누구나의 추억과 미련들을 나 또한 간직하고 있다. 고인이 원로분의 마음이 백번 이해된다. 부모들의 못다 한 꿈을 자식이 대신하길 원하거나 강요하는 것도 얼마든지 끄덕여진다. 그 나이가 차서인지 당구 칠 맛 나는 세상에서 오늘도 당구장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 나 또한 누군가를 그리며 역사의 틈새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 69년 6월 23일 경향신문 : 22일 폐막된 제1회 전국 드리쿠션 대회에서 이리 출신의 전광웅 씨가 1위를 차지했는데 전 씨는 결승리그에서 7전 7승 타율 0.85로 우승했다.”


** 내기당구를 쳐서 생활하는 사람.(=생활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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