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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7. 2023

당구 민주주의

당구장에서 ~ 36

사람 상대하는 직업만큼 고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당구장이 그렇다. 겉모습은 차려놓으면 다 될 것 같은 손쉬운 구조다. 공 가져다주고 당구대 닦고 계산하고 청소하고. 이 맛에 현혹되어 초보들이 곧장 망하는 지름길로 접어드는 당구장. 초보자는 무슨 말이냐며 의아해한다. 중급자는 담담한 표정 지으면서 오뚝이처럼 이쪽저쪽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묵은 당구 밥은 이 말의 의미를 잘 알리라. 에두른 세월로 짜장면 하나에 울고 웃는 인생사를.


당구장이 국가라면 주인은 한 나라의 수장이다. 국가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지만 세금을 걷어 들이는 방식은 똑같다.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가장 많이 건국했으며 당연히 망국도 허다하다. 창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상업 사회의 생존환경이 주된 이유에서다. 동네마다 여러 곳 있으며 전국에 만 오천여 개의 국가가 나름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건국할 당시는 지구를 통일시킬 것 같은 건장함을 과시하지만 해를 넘길수록 기운을 잃게 된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매매하거나 망하거나 또다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일만 남게 된다.


쿠데타가 없어서인지 돈만 있으면 아무나 만들어서 통치해도 되는 줄 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 대륙이(신도시) 생성되면 어김없이 당구장 간판이 가장 먼저 들어선다. 당구가 인간을 길들이기 좋은 환경이지만 국가를 만들 땅은 언제나 포화상태다. ‘이제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지 않겠지.’라는 방심은 금물이다. 안일함을 비웃듯 마술같이 빌딩 숲 사이를 비집고 또다시 출현한다. 돌아서면 동그란 국기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니 많긴 많다.


터가 좋지 않아도 초창기에는 모른다. 대통령 놀이에 아주 열정적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백성들에게 *물배를(공짜 음료) 채우기 위해 돌아다닌다. 처음에는 좋다.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물배만 채워서 될 일이 아니란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하나 둘 백성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비옥토가 아니란 것을 뒤늦게 실감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근처에 국가가 또 들어서기 때문이다. 곧장 후회하며 세월과 소주가 친구 되는 일만 남는 것이다.


대통령 모습이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백성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이유 없듯이 인구를 늘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세금을 더 걷어야만 부국임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꿈나무를 최대한 양성해야 하는 의무 또한 잘 숙지해야 한다. 호기심으로 충원된 어린 백성들을 다독이며 머릿속에 당구공을 최대한 주입시키면서 효과를 얻으려 한다. 다른 나라로 이민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한시라도 눈 뗄 수 없다. 고달픔이 이어지니 외롭고 서글픈 감옥살이가 시작된다.

 

수장은 국가의 소유권을 타인에게 넘기기도 한다. 마치 중세의 귀족과 양반처럼 말이다. 부도 사태 징조가 보이거나 터가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돌면 주저 없이 팔아버린다. 때에 따라서 대리수장을 내세워 흥정하기도 한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또다시 건국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으며 여러 국가를 거느리는 수장도 물론 있다. 이들에게는 적의 침략이나 자연재해 등의 변수에 재빠르게 대응하는 기지가 엿보인다. 통치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백성은 시간의 소유물 즉 노예다. 빙글빙글 당구공에 심취한다는 이유만으로 세금을 낸다. 많이 내는 사람과 적게 내는 사람 그리고 국가의 기여도에 따라서 내지 않기도 하며 덜 내기도 한다. 가끔 더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소문은 삽시간으로 퍼진다. 그만큼 백성들은 세금에 민감하다. 죽자고 세금 내면서 내세울 수 있는 권리는 단 하나 “음료수 좀 더 주세요.” 그래서 돌아서면 당구대 탓! 당구공 탓! 을 하며 국가의 질서를 무너트리려 한다. 성질 같아서는 이민 가고 싶겠지만 다들 형님 동생 사이라서 한 바가지 욕으로 분을 삭여 버릴 때가 많다.


벗어나는 일은 아주 쉽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큐 가방만 울러 메고 떠나면 그만이다. 투자 이민이라는 명목도 필요 없으며 영주권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국가에서 선심 쓰며 초빙할 때도 있다. 주로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이 함께 움직인다. 때로는 독보적인 아나키스트들도 대열에 합류하여 백성인 척 행세하기도 한다. 가끔 자유인이 되고 싶지만 지구라는 땅덩어리에서 국가는 감히 사라질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굴레 속으로 세금 내러 가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 상업 사회의 기호음료에 맞춰서 요구르트, 쿨피스, 박카스와 유사한 병 음료, 등을 비치하여 손님들에게 봉사하는 호객행위다. 요즘은 커피 문화의 흐름을 좇다 보니 음료 지출로 계산기를 자주 두드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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