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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0. 2023

마법사 당구

당구장에서 ~ 5

콜럼버스가 원주민을 납치한 사건은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노예무역이 제국화의 강력한 힘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감추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노동력 착취, 부의 원천이기도 하며 오늘날까지도 허용되는 공식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줄이려 하고 많이 받고 싶은 관계의 연속선에 놓인 우리들. 그 틈새로 당구에 매료되는 행위는 중세 · 근대 · 현대 ·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통치의 수단으로 당구를 길들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들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거의 모든 표정을 만들어가는 당구, 어쩌면 인간이 붙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1830년 벨기에 출신 자크 베노이트(1782~1854)


신항로개척시대 수리남 배경의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네덜란드 상인들과 원주민들이 당구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설탕 농업에 투입된 사람들 같다. 조그마한 당구대 주위로 소란스럽게 당구 치며 놀고 있는 원주민들. 상인들이 구석에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원주민이 잔을 들어 건배를 권하지만 상인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거만한 모습으로 지켜만 본다.


1764년 가와하라 케이가(川原慶賀)


이후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외래 문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게이샤들에 의해 박래품과 신식 문화가 일본 전역에 전파되었으며 이때 당구와 배드민턴이 보급되었다고 한다. 보존되어 있는 게이샤들의 당구 치는 모습에서 수리남의 원주민들이 투영되는 것은 왜일까. 임진왜란의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기에 네덜란드 선박기술과 과학지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울러 유럽 열강들의 지구적 침략을 답습하며 조선을 통한 대륙 진출을 도모했던 것 같다.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근대화의 물결이 성큼 다가왔다. *인천항에 한 대의 옥돌 당구대가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이듬해는 거문도에 영국 함선이 출현하자 당구와 테니스가 함께 상륙했다. 한민족이라고 당구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기껏해야 초계지 호텔이나 외교관 클럽에서(구락부俱樂部) 볼 수 있었던 당구대가 경인선의 화물칸을 차지하면서 황실로 직행해 버린 것이었다.


강점기였지만 당구의 위상은 꿋꿋했다.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이바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진 재산으로 부역하며 당구를 즐기는 한량들도 많았던 것 같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당구시합이 개최되었다. 당구장 개업도 신문사에서 홍보할 정도였으며 해외당구소식은 당연한 듯 지면을 차지해 버렸다. 당구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대회로 의식의 흐름을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을까. 


하와이 설탕 농장으로 내몰린 한민족의 애환이 노랫가락으로 메아리친다. 강제노역으로 저승에서 헤매고 있는 어린 용사들도 울부짖고 있다. 위안부의 피눈물은 언제나 닦는 척만 한다. 당구와 국가별 자본주의(신자유주의)가 궤를 같이한다면, 그릇된 생각이더라도 돈이라는 놈이 사람들을 홀리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중산층이 사라지는 그날 당구는 어떤 모습으로 인간의 곁에 있을까. 아니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당구의 곁에 있을까. 사뭇 궁금하다.


“세계 당구 랭킹에서 새로운 베트남 이정표를 세웁니다.” “베트남에서 역사를 만듭니다.” 세계대회 우승자를 극찬하는 베트남 언론사의 메인이다. 일본이 그러했듯 이미 한국산 당구 재료가 베트남에 수출되었다. 가장 선호하는 스포츠가 축구라고 한다. 우리의 옛 모습과 너무 닮는다.




* 1884년 최초의 공식적인 당구 기록이다. 수입된 당구대 한 대의 도착지는 불분명하나 추측건대 조계지나 호텔 또는 일본인 개인 저택에 설치되지 않았을까. 당시 인천항 근처에는 일본과 청국 그리고 서양 각국의 조계지와 외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이 있었다. 그중에 1884년 9월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해리 호텔”에 당구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일본에서 수입된 공식적인 기록보다 몇 개월 정도 빠른 시차를 보인다. 아마도 이미 개방된 부산항으로 밀수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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