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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구와 인간 Jul 20. 2023

문명화의 소용돌이

당구장에서 ~ 4

빠져들면 밤하늘의 별이 당구공으로 보인다는 당구의 세계.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다들 그러기에 그 말을 이해하려 애쓰는 척할 뿐이었다. 유난히도 반짝이던 어느 여름날 밤 호기심이 작동되었다. 옥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구공을 찾아보았지만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수많은 별들 중 억지로 억지로 한 녀석을 당구공으로 변신시켜 버렸다. 적구를 만들어 진로 방향을 설정하고 유도해 보아도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왜 별이 당구공으로 보인다고 했을까. 그렇게 신세계의 문을 닫아야만 했던 첫날밤이 잊히나 했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서 당구공이 춤추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었다. 소리까지 들려오는 통에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틈만 나면 당구장에 달려갈 생각만 하는 내 모습이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런 게 당구에 빠진다는 거였구나. 그럴 만도 다. 둥근 녀석이 기묘하게 굴러다니면서 사람 마음을 헤집어놓기 일쑤였다. 세상에 이런 요물이 있었다니. 평생토록 괴롭히며 괴로움을 안겨줄 줄 꿈엔들 알았으랴. 녀석의 정체를 진즉에 알았다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터인데.  


개나 고양이가 공 굴리며 장난치는 모습이 낯설지 않듯, 사람들 또한 둥근 돌멩이에 자연스레 손이 가듯, 구체는 인간의 감정을 툭 건드리는 재주를 지니는 것 같다. 원시 시대도 그랬을 것이다. 바람에 열매가 떨어져 구르듯 한낮의 태양도 밤하늘의 둥근달도 어디론가 굴러가는 모습이다. ‘떼구루루’ ‘떼구루루’ 구체의 형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뭇가지를 꺾어 툭 건드려 버렸다. 탁! 탁! 구기 종목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부딪치는 소리도 문자 배열에 합류하여 문명의 시작을 알리지 않았을까.


중세 유럽의 궁전에서 당구대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두 곳이 아니다. 프랑스 *루이 11세가 당구대를 주문했던 기록을 최초로 나라마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습 하나하나에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마구 상상될 정도로 생동감마저 넘쳐난다. 여가를 즐기며 정치를 도모할 정도로 왕과 귀족들에게 사랑받았다고 한다. **사비 들여 당구장을 만든 왕이 있을 정도로 당구는 통치 그 이상의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당구대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며 왕의 위용과 품위를 지켜내는 모습이다.


교회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당구의 흔적들이 차고 넘쳐난다. ***십자군에서 돌아온 기사단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다는 학설이 설득되고 있을 정도다.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었다고 한다. 너무 빠져들기에 타락한 것으로 비난받아 금지하기도 하였다. 초기 미국 역사에서도 같은 현상을 드러내며 종교적 목적을 위해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당구 속에 내포된 고유의 매력과 성직자들의 부패한 시각이 수시로 대치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영향력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당구에서 바라본 문명 이야기는 콜럼버스의 항해에서 출발하고 싶다. 문명화의 도구로 쓰였을 가능성 때문이다. 출항 당시 당구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꽃 피울 무렵이었다. 이후 중, 동유럽으로 전파되면서 신항로 개척을 위해 함선에 실려 버린 운명을 겪게 된 것 같다. 인도에서 스누커가 탄생했듯이 거의 모든 식민지에 보급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마지막 종착지는 일본이었다. 이후 일본은 기술을 습득하여 자국산 당구대를 한국과 중국에 수출하게 되는 제국주의 배경이다.


돤치루이


전시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7년 전쟁의 에피소드를 당구로 묘사한 판화 유물과 세계 대전에서 군인들이 당구로 위로받는 모습에서 얼마든지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우리나라 강점기를 보더라도 쉽게 끄덕여진다. 각국의 제독들이 구락부에 모여 당구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침략의 정당성을 도모했던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도 사구를 즐긴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인류에게 사랑받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장엄한 문명의 길 실크로드에도 당구의 흔적들이 있을 터인데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국의 지난 당구 역사가 영원히 묻혀버린 것 같다.


중국뿐만 아니다. 중 · 동유럽권도 한때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해서인지 오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흔적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쨌든 ****당구의 어원을 빌미로 프랑스가 원류임을 인정하는 세계적 흐름 속에 유럽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형국이다. 영원할 것 같았지만 세상은 독재를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지금은 최대 동호인을 거느린 한국의 당구문화가 문명의 그림자 뒤를 바짝 쫓으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양새다.


문명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당구. 두 개의 정사각형을 꼭 붙여놓은 당구대 위에서 큐는 오직 찌를 뿐이다. 지칠 줄 모르며 완벽한 구체의 당구공이 하염없이 구르고 있다. 그 안에서 형성되는 표현 각은 거짓이 없다. 늘 한결같다. 그 모습이 마치 문명의 직진 속에서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스마트폰으로 천하를 살핀다지만 끝이 있는 운명의 길은 문명의 길이 아닐까. AI가 문자를 아무리 삼켜버린다 해도 당구는 제 모습을 잃지 않을 것 같다.




*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당구는 1700년대 중반까지 모든 프랑스 카페에 확산되었다.

** 루마니아 캐럴 1세

*** 십자군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혈통의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당구를 가져왔다고 한다.

***** Billiard는 프랑스어 bille(나무 조각 또는 곡선 막대기)에서 파생. 또는 billes(공을 포함하여 다양한 구형 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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