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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Nov 22. 2020

2-3. 박해에 쓰러져 간 진리의 예들

박해에 쓰러져 간 진리의 예들

Plato Won 作


역사는 박해에 쓰러져 간 진리의 예들을 무수히

기록으로 남겨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밀은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탄압이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진리를 찾는 열정이 뛰어나다고 자부하지 못한다면 자신과 대중이 절대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가정을 던져 버려야 한다고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 최고 권력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고 자부할 만한

황제였다.


그는 절대 권력자였지만 정의감이 넘치고 심성이

따뜻한 인물로, 그가 저지른 작은 실수와 약점들은

그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고대 윤리학 중 최고로 인정받는 명상록의 저자

이기도 한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설파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뒤를 이었던 왕들 가운데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황제였으며 개방적이고

막힘이 없는 지성의 소유자였다.


고결한 인품을 가진 그의 글 속에는 그리스도교

적인 이상이 가득했지만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당시 사회는 몹시 불안했고 이런 상황

에서 그리스도교가 혁명적 변화를 부르짖자 그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과정

에서 그리스도교가 오히려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중의 박해에 쓰러져 간 진리들의

예는 많다.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다.


모든 지식인들의 선생이자 철학자의 양대 산맥

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스승이기도 한 소크라테스를 2,500년 전

아테네 법정은 나라에서 공인하는 신들을 부인하고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법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박해의 사건이 하나 더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이다.

예수의 일생과  그가 남긴 말씀을 보고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를 지극히 존경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말씀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어이없게도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십자가형을 당했다.


그런데 이처럼 한심한 일들을 뒤돌아볼 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악역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전혀

악인이 아니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지만, 우리들도 그 시대에 태어났더

라면 그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게 밀의 생각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

들이 매우 지혜롭고 미덕을 갖추고 있는 경우는 더욱

충격적이다.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죽어서야 책을 출판할 수 있었고, 브루노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화형을 당했으며, 갈릴레이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을 부인하기도 하였다. 지동설이 온갖 박해에도 살아남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묻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진리에 대한 모진 박해였다.


진리가 단지 진리라는 이유로 온갖 박해를 극복하는

고유의 힘을 가진다. 진리를 향한 인간의 정열은

그다지 강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력한 사회적

제재가 있으면 진리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 있다.


밀은 진리가 가지는 진정한 이점이 있다면,

그것이 여러 번 박해로 소멸될지라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것을 다시 발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좋은

시기를 만나 박해를 피하게 되거나 또는 박해에 맞서

싸워 이길 만한 힘을 가지게 될 때까지 거듭 전진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고 했다.


진리란 그렇게 힘들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고 다시 드러내기를 반복하다 우리 곁으로

조심히 다가선다.


역사는 또한 신앙의 유무로 행해진 고약한 법률적

박해의 사례를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 성찰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믿음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마음속 깊이 적대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 적대적인 생각과 감정이야

말로 정신적인 자유를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1857년 영국 콘월 지방의 순회 재판소에서 한

남자가 그리스도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영국 중앙재판소에서 두 사람이 각각 자신들에게는 신앙이 없다고 솔직히 고백했다가 배심원 자격을 박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외국인 역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도둑을 맞고도 고소를 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이었

일까? 그것은 신이나 내세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는

법규 때문이었다.


내세를 믿지 않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 하는 선서는

효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법규에 의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재판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이러한 일은 역사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밀은 말한다.


역사를 통틀어 보면 무신론자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학식과 덕목이 뛰어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런 법규는 자기 파괴적

이어서 스스로 자신의 기초를 파괴한다.


이는 양심적인 사람이 법정에서 증언을 했는데 

무신론자라는 이유만으로 증언이 채택되지 않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무신론자 못지않게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모욕을 안겨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라는

논리를 연장해 보면 내세를 믿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유는 혹시 지옥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모욕적인 논리로 귀결된다.


19세기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를 식민지화

하고 있었는데, 당시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라는

인도인 용병을 고용하고 있었다. 세포이들은 신식

무기인 탄약통 수령을 거부했는데, 이는 탄약통에

소와 돼지기름이 발라져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인도인들의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소를

신성시 하고 돼지를 멀리했으므로 인도 용병인

세포이들이 종교적 이유로 탄약통을 거부한 것이다.


이 사건은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번져 인도

델리 근교 소도시에서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를

‘세포이의 항쟁’이라고 한다.


당시 영국인들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편협적이어서

성서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공적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은 공공

기관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영국의 한 국무차관은 그리스도교의 신성함을 믿지 않는 사람은 관용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었다.


밀은 과거 오랫동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법적 처벌보다 처벌 뒤에 따르는 사회적 불명예였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불명예의 효과는 너무나 커서

영국 사람들은 사회적 금기를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법적 처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털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여론의 폭력이다.


여론에 반하는 새로운 의견을 내놓는 것은 밥벌이

수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 법적 처벌만큼 두려운

일이다.


다수라는 이름으로 생각의 표현을 제한하는 것이

여론이 가진 폭력성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밀은 자유론을 통해 다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여론의 폭력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진리가

침묵하는 현실을 심각히 경고하고 있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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