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lato Won Nov 22. 2020

2-6. 치열한 논쟁 속에서 피어난 확고한 믿음

Plato Won作


치열한 논쟁 속에서 피어난 확고한 믿음

밀은 도덕과 인간에 대한 주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 심지어 악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는 사람까지도 자유롭게 자기주장을 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유 토론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특히 별생각 없는 일반 사람들은 진리의 분명한 근거만 배우고, 나머지는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믿고

따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어려운 문제에 대응할 능력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특별히 훈련받은 전문가들이 잘 대처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다.


설령 이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자유로운 토론의 필요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자유 토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특정 문제에서 제기되는 모든 비판에 대해 만족스러운 답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답변을 요구받는 문제가 자유롭게 거론되지 않으면 어떻게 답변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그 답변에 반박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이 만족스러운지 어떤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일반 시민들은 모르지만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문제의 핵심에 대해 소상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가장 자유스러운 상황에서 마음

놓고 토론을 벌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이 당혹스러운 문제에 대해서 반대편

의 주장에 대해 효과적으로 답변할 수 있도록 이단자들이

쓴 금서를 읽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특별히 허락받은 경우 외에는 제한을 가했는데, 이것은 결국 일반 사람들에 비해 엘리트들에게는 정신적 자유는 아닐지라도 정신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주는 셈이었

다. 비록 자유가 없는 문화였기 때문에 결코 정신이 관대하거나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런 방법을 통해 목표했던 대로 정신적 우위를 확보했다.


그런데 기존의 주장이 사실인 경우 자유 토론을 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은 없을까? 밀은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히 그 주장이 근거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

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고 보았다. 생생한 개념과 분명한 확신 대신에 그저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남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윤리적 이론과 종교적 신념들이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계율을 신성한 것으로 믿으며 그 법에 따를 것을 다짐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자 가운데 계율과 원리에 따라 철저히 자기 삶을 규율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믿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적당히 믿고 적당히 행동한다. 물론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만일 그들도 그렇게 행동했다면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교만의 문제가 아니고 도덕이나 종교는 물론이고 인생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각종 언어로 쓰인 이 세상의 책들은

정작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살아 있는 신념은

되지 못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세상의 진리 가운데는 경험하지 않으면 그 참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도 많고, 인간은

꼭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밀은 말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고

모르는 사람들도 이것을 잘 들었더라면, 그렇게 이해된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확실해지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치명적 악습이다.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면서 더 이상 논쟁 대상이 되지 않는 이론은 당연히 늘어났다. 심각한 문제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의문이 줄어든다는 것은 진리가 확정되는 과정이다.


잘못된 의견이 그렇게 확고해지면 나쁜 영향을 주겠지만, 참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한 의견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낳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비판하는 과정에서 어떤 진리에 대해 생생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되는 것도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대한 스승들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무엇이 문제이고, 왜 그런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도록 노력해 왔다.


밀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보았다. 어떤 문제에 대해 본인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도록 일깨워 주고, 스스로의 무지를 깨달은 뒤 그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한

바탕 위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다.


중세 시대의 학교 토론도 이와 비슷한 목적을 가져,

학생들이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를 이해하고 나서 자기 견해의 근거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밀이 살았던 당시 영국의 교육 방식은 지나치게 주입식 교육에 치우치면서 위와 같은 방식들이 제공하는 장점 중 최소한의 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적극적인 논쟁

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논리의 저편에서 토론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밀은 부정적인 비판은 긍정적인 지식이나 확신을 획득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법이나 이론이 이의 제기를 허용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그 믿음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마땅히 부정적 비판을 해야 한다고 밀은 『자유론』에서 말하고 있다.


치열한 논쟁 속에서만 확고한 믿음이 잉태된다.


Plato Won

작가의 이전글 2-3. 박해에 쓰러져 간 진리의 예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