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야전 침상인가,안락한 침상인가,아니면 짐인가
"에수님은 히틀러를 사랑하실까?"
Plato Won 作,여명이라고 모두에게 희망빛을 비추지는 않는다.다만 희망을 향해 행동하려는 의지의 발걸음에만 보다 많이 쏟아 붓는다.
악인에 대한 동정은 그 상대방에게
고통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히틀러를 사랑하실까?"
동정이나 연민이 도덕의 원칙일 수 없다는
것이 칸트나 니체의 윤리학적 주장이다.
"동정심에서 나온 행위는
참된 윤리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칸트가 '윤리 형이상학 정초'에서 한 말이다.
"고통받는 벗이 있다면,
너는 그의 고통이 쉴 수 있는 쉼터가,
그것도 딱딱한 야전 침상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그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위대한 사랑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그런 사랑은 용서와 연민조차도 극복한다.
연민은 수치심을 너무나 모른다.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거기서 쐐기가 자라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한 말이다.
타인의 고통에 동정심이나 연민을 품고
어설프게 그 고통에 안락한 침상을 제공한다고
그 사랑이 위대해지지 않는다.
칸트와 니체의 도덕에 대한
철학적 인식은 단호하다.
"어설프게 동정하지 마라"
악인에 대한 어설픈 동정은 그 악인으로부터
고통받은 사람에게는 더 큰 고통이다.
고통받는 벗에게는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임시적인 딱딱한 쉼터를 제공해줄 수
있을 뿐인데도, 어설픈 동정심으로 안락한 침상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그를 더 큰 수렁으로
내 모는 쐐기가 될 수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다.
그 고통은 오직 스스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고통에 대한 타인의 도움은 임시적인 디딤돌이나
딱딱한 야전 침상의 역할만 할 뿐,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나가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평생 어떻게 짊어지겠다는 건가.
그것은 오만이고, 고통받는 그에게도 수치심이고
자존심에 상처를 덧입히는 쐐기가 된다.
"동정은 결코 도덕의 원천일 수 없으니
어설프게 동정하지 마라"는 것이
칸트와 니체의 도덕에 대한 일관적 철학적
인식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대하는 나의 도덕과 윤리적
태도는 딱딱한 야전 침상인가,안락한 침상인가,
아니면 무심코 지나치는 방괸자인가,이도 저도
아니면 혹 짐이지는 않은가.
Plato Won
2022년 11월 3일 사유는 거미줄 똥고에서
거미줄이 고구마 줄기 엮이듯 이어져 관조가
정신이 혼미하다 아우성이다.
늦가을 여명은 빛바랜 느낌의 앤틱한 색감으로
심쿵한 내 가슴에 물감을 드리운다.
어느 시크한 시인이 가을을 제일 좋아해서,
얼굴에 화장하기가 미안하다 했던 그 가을이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