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정의가 바로 선 국가를 위하여 추상화 해석

2-4,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

by Plato Won


(1) 폴리스적 동물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정과 마을 등의 모든 공동체는 ‘좋음’을 목적으로 생겨납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좋음을 지향하는 폴리스, 즉 국가는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족적인 공동체라는 점에서 완전한 공동체라 보았지요.


국가는 인간의 생존과 필요에 의해 저절로 형성되었지만.

구성원들의 좋은 삶을 위해 존속하는 최선의 공동체입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의 원래 뜻이

’폴리스적 동물’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인간은 최선의 공동체인 국가 속에서

완전하고 자족적인 삶을 위해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집단 지향성과 언어 사용


인간은 무리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벌이나 개미도 무리를 이루어 사는 군서 동물이지만,

인간의 무리는 그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단순히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타인들과 공유하는 등,

상징적인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장류학자 마이클 토마셀로는 『생각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인간 고유의 능력을 ‘집단 지향성’이라 명명합니다.

인간의 생각은 진화의 산물로써,

새로운 상황을 알아채고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고자

인지 능력과 사고력이 생겨났으며, 개인 지향성에서 공동 지향성,

집단 지향성 순으로 진화해 왔다고 말이지요.


상호 간의 경쟁과 지적 의사소통을 특징으로 하는 ‘개인 지향성’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의 대형 유인원에게서 관찰됩니다.


‘공동 지향성’은 협력이 경쟁보다 생존에 효과적인 전략임을 보여 주는데,

사회적 문제 해결, 협력적 의사소통이 특징이지요.


가장 발전된 단계인 ‘집단 지향성’은 오늘날의 인류에게서 관찰되며,

집단의식 문화와 관습적 의사소통이 특징입니다.

인간의 영역이 가정과 마을을 넘어 더 큰 공동체, 즉 정치 공동체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집단 지향성 덕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단 지향성은 추상적인 사고를 전제로 하므로

언어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사실을 기록하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뿐만 아니라 후세에까지 전달합니다.

그 결과 역사와 철학을 비롯한 학문과 예술,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지요.


(3) 법과 정의 그리고 국가


언어는 유익하고 유해한 것, 옳고 그른 것을 밝히는 데 쓰입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해 주는 법과 정의도 이러한 언어 사용,

다시 말해 이성 활동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 역시 희미하게나마 불평등을 인식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사례가 있어 흥미를 끕니다.

지능이 높은 동물로 손꼽히는 카푸친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진이 돌멩이를 가져오면 오이를 주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원숭이들이 교환에 성실히 응하자, 일부에게는 오이를,

일부에게는 포도를 주는 식으로 차별을 두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껏 오이에 만족하던 원숭이들은

달콤한 포도를 받아가는 동료를 보고 교환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돌멩이를 던지며 분노를 드러냈지요.

연구진은 단지 포도를 더 좋아해서 그런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포도가 가득 든 그릇을 바로 앞에 놓아둔 채로,돌멩이를 가져오면 모두에게 동일하게 다시 오이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원숭이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교환에 응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이 그 자체가 아니라 동일한 행동에 다른 보상을 주는

불공평함과 불공정함을 거부한 것이지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분노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불공평과 불공정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자신인 경우,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기란 매우 어렵지요.

사사로운 이익을 넘어 타인과 공동체의 이익까지 고려한다는 점에서

‘정의’는 가장 완전한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이 지향하는 가치가 정의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순간적인 좋음에 현혹되어 욕망만 채우는 삶은

생존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폴리스라 부를 가치가 없다고 했지요.


좋은 국가란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서게 해 주는

자유롭고 동등한 시민들의 이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숙고의 과정을 거쳐 합리적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욕망에 휘둘리는 노예가 아니라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주인입니다.


이런 개인들이 모인 국가야말로 단순한 생존과 안전 보장을 넘어 모두에게 ‘좋은 삶’을 보장해 주는 진정한 폴리스입니다.


(4) 추상화 이해하기


그럼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에서 법과 정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추상화를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볼까요?


엇갈린 칼과 창, 그리고 망치와 저울이 보입니다.

그 아래로 쇠사슬과 문서들이 한가득 펼쳐져 있군요.

저 너머로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연상시킵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사람의 옆얼굴.

아크로폴리스를 닮은 언덕 쪽을 향한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따져 본다는 의미의 ‘심사숙고’.

이 말은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 사안을 결정하기에 앞서

그 상황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심의 과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형상은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상징합니다.

판사봉과 저울, 문서들 위로 사람이 등장한 것은

법과 정의가 언어 사용, 근본적으로 이성 활동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편으로 야수가 등장했습니다.

야수의 출현에 아랑곳 않고 사람의 머리 부분이 빛을 발하는군요.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적 욕구를 갖고 있지만,

이성을 통해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채로운 존재감을 드러내는 판사봉과 저울.

법과 정의가 바로 서면서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있음을 암시하지요.

채색된 문서는 법과 정의가 언어의 산물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줍니다.

칼과 창, 쇠사슬까지 함께 채색된 것에서

인간에게 언어는 일종의 무기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어느덧 무채색으로 되돌아온 판사봉과 저울.

법과 정의가 본래 의미를 잃고 퇴색해 버렸습니다.

이 틈을 타서 괴수의 얼굴이 짙은 어둠에 휩싸입니다.


이윽고 야수의 얼굴이 냉혹한 푸른빛을 띠는가 싶더니,

주변이 온통 화마에 휩싸입니다.

구성원들은 욕망의 노예가 된 지 이미 오래고, 사회에는 폭력이 난무합니다.


법과 정의에서 이탈할 경우, 인간은 가장 훌륭한 동물에서 가장 사악한 동물로 한순간에 전락하고 맙니다.

인간이 학문과 예술, 문화처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언어 사용, 즉 이성 활동 덕분입니다.


그러나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이러한 능력을 사용하여

가치 있는 것들을 얼마든지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무장한 불의가 가장 다루기 어렵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법과 정의를 탄생시킨 언어와 이성을

법과 정의를 외면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다행히 인간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언덕 너머의 삼각형은 기하학, 즉 변하지 않는 원칙을 상징합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것이 희망인 것처럼,

법과 정의는 아직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영상 효과 디렉션] 판사봉과 저울을 스케치 상태로 두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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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워 보이는 푸른 하늘과 자연.

한 가닥 희망의 불씨가 부활하면서 법과 정의가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야수에 맞서,

빛에 감싸인 인간의 얼굴이 온화하게 빛납니다.


그림 속 야수와 인간은 별개가 아닙니다.

대조적인 두 가지 면모가 합쳐져야 비로소 완전체가 되는 존재.

이것은 야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을

한 몸에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인간에 대한 평가가 ‘가장 위대한 존재’와 ‘가장 위험한 존재’라는

양극단을 오가는 이유는 이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삶을 신에 가까운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동물 이하의 최저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이성에 달려 있습니다.


법이 정치의 결실이라면, 정의는 윤리의 핵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과 정의, 다시 말해 정치와 윤리는

인간 최후의 안전망과도 같습니다.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만물의 영장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니까요.

현실을 고려한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야말로

개인과 공동체의 ‘좋음’을 아울러 고민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출발점입니다.

법과 정의가 바로 선 국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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