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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Mar 09. 2024

인간의 인식체계를 극상으로 밀어 올린 문장 하나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사유와 질문이리는 돌을 쌓아 철학의 성을 만든다.
M.G.Han 作,일본 오사카 성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것만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동어반복, 너무도 당연한 시답잖은 이 말이

철학의 난이도를 극상으로 밀어 올린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사유다.


그는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머릿속에 없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다'와 '없다'를

철학적으로 최초로 사유했던 철학자다.


그가 '있다''없다'

극단적 지점까지 몰아가며 사유한 이유는

변화하는 감각세계를 언어 논리적으로 포착해

새로운 철학적 사유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라는 하나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추론해 낸다.


우선, 존재하는 것 이전에 없는 것은 없으므로

존재하는 것의 기원은 따져 물을 수 없다.


기원 자체를 따져 물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기에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는

완전한 것이 된다.


세상에 없는 것은 없다면

있는 것만 있다는 이야기이므로,

이것은 있는 것이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 그런 추론이 가능하냐고?


만약 여러 개가 있으려면 있는 것들 사이에

그것을 구분해 주는 '없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있는 것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단 하나인 것이다.


이 하나밖에 없는 것을 일자(一者)라고 한다.


세상에 일자밖에 없다는 것은

 '운동'도 '변화'도 없다는 것이 된다.


있는 것이 운동을 하려면 없는 것으로

이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없는 것은 없으므로

이동도 있을 수 없다.


변화도 마찬가지다.


젊은 나의 지금 모습이 늙으려면 젊은 나는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없음은 없음으로

지금의 나는 없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없음을

통과해서 내가 늙음으로 변할 여지도 없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이란


"눈과 귀, 촉감 등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라거나 "어떤 시공간에 위치해 있다"등으로

정의하지 않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라는 하나의 전제에서

'있는 것'의 성질들을 논리적으로만 추론해

나가고 있다.


이런 논리적 추론으로 파르마니데스는

세상에는 변화도, 운동도 없으며 오직 영원부동의

일자(一子)있다고 사유했다.


그런데 인간이 세상을 변화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자신의 감각을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각의 오류가 세상을 변화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으로, 이는 환상이자 기만이라고 봤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적 추론을 따라가면

없다가 있거나, 있다가 없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아닌 게 된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학문을 연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참된 진리를 따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의견을 따르는 길이다.


의견의 세계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습관을 따르는 대신

이성을 통해 깨달은  참된 진리의 길을 걸어야

하는 당위성은 확보되었고,

이는 서양철학의 뿌리로 자리매감하게 된다.


진리'란  변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며,

영원불변의 본질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사유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으로 이어졌고,


화이트 헤드는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으니,

지금의 서양철학과 인식체계는 파르메니데스

사유에 신세 진 것이 된다.


서양철학이 이성을 중시하고 감각을 멀리하며,

욕망을 배척하고 금욕적 생활을 중시하는 그 근저

에는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적 사유가 숨 쉬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만물은 변하므로 흐르는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고 하였는데,

파르메니데스는 변하는 것은 허상이라고 한다.


세상은 변하는 것인가, 변하지 않는 것인가?

세상만물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절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사유가  내 귓가에 메아리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나에게 사유하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이니,

세상의 모든 것은 '사유'라는 하나에서 출발한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단순한 명제 하나가

철학의 난이도를 극상으로 밀어 올려,

인간의 인식 체계와 영역을 광활한  우주보다

더 넓고 깊게 만들었다.


사유와 질문이 철학의 시작이자 삶의 본질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난해한 논리를

이 새벽에 촘촘히 다시 따라가는 이유는


"사유하는 모든 것은 다 있다는데

못할 일이 무엇인가?

못한다면  다 의지박약인 것이지."


리는 사유에 대못질을 해서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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