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날들
태양은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고 내리쬐는 열기는 도처에 있다. 발갛게 익은 아이의 볼이나 길에 피어난 질기고 긴 풀잎에서 찾을 수 있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도 반가워지는 날들이다. 모든 것이 충만한 이 계절은 아주 길고 아름다워서 조금 떼어내어 어딘가에 영영 담아두고 싶었고 나에겐 담아낼 그릇이 그림밖에 없다는 생각을 되뇌며 작업에 대한 강박을 손에 쥔 채로 잠들곤 했다. 그렇게 여름의 중턱에 와서야 겨우 그려낸 그림들은 여름의 여러 모양 중에 가장 작은 부분만 골라낸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게 빈틈없이 맞물려있는, 가득하고 완벽한 시절은 캔버스 앞에 선 나를 자주 주눅 들게 하였다. 쓰고 싶은 색은 많았으나 처음으로 그어야 하는 선의 모양과 굵기를 도저히 모르겠는 것이다. 공원을 서성이거나 어딘가로 향하는, 물리적으로 작업이 불가능한 때에는 이미 완성된 그림의 모습이 감은 눈 안쪽으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였으나 서둘러 집에 돌아와 붓을 들면 끝끝내 한 획도 긋지 못한 채로 하루를 끝마치곤 했다. 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발 밑에 있을까 봐 두려웠다.
넉넉한 여름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작업으로부터의 가난을 상쇄시켜 주었다. 저 멀리서부터 무엇인가를 잔뜩 묻혀온 것 같은 무겁고 더운 바람은 가볍고 옹졸해져 말라버린 내 안을 채우면서 떨어지려 하는 두 발을 땅에 닿도록 눌러주는 것 같았다. 땅을 딛고 한참을 걷다 보면 가공되지 않은 생각의 잔여물들이 땀과 함께 몸 밖으로 나가 마르면서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 나는 충분한 더위를 가득 안은 채로 자주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비어있는 곳이 여름으로부터 메워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그릴 수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름은 영원히 그림 안에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