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수지 Aug 02. 2021

가득한 여름

충만한 날들

             

 태양은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고 내리쬐는 열기는 도처에 있다. 발갛게 익은 아이의 볼이나 길에 피어난 질기고 긴 풀잎에서 찾을 수 있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도 반가워지는 날들이다. 모든 것이 충만한 이 계절은 아주 길고 아름다워서 조금 떼어내어 어딘가에 영영 담아두고 싶었고 나에겐 담아낼 그릇이 그림밖에 없다는 생각을 되뇌며 작업에 대한 강박을 손에 쥔 채로 잠들곤 했다. 그렇게 여름의 중턱에 와서야 겨우 그려낸 그림들은 여름의 여러 모양 중에 가장 작은 부분만 골라낸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게 빈틈없이 맞물려있는, 가득하고 완벽한 시절은 캔버스 앞에 선 나를 자주 주눅 들게 하였다. 쓰고 싶은 색은 많았으나 처음으로 그어야 하는 선의 모양과 굵기를 도저히 모르겠는 것이다. 공원을 서성이거나 어딘가로 향하는, 물리적으로 작업이 불가능한 때에는 이미 완성된 그림의 모습이 감은 눈 안쪽으로 스쳐 지나가기도 하였으나 서둘러 집에 돌아와 붓을 들면 끝끝내 한 획도 긋지 못한 채로 하루를 끝마치곤 했다. 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발 밑에 있을까 봐 두려웠다.

 

 넉넉한 여름은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작업으로부터의 가난을 상쇄시켜 주었다. 저 멀리서부터 무엇인가를 잔뜩 묻혀온 것 같은 무겁고 더운 바람은 가볍고 옹졸해져 말라버린 내 안을 채우면서 떨어지려 하는 두 발을 땅에 닿도록 눌러주는 것 같았다. 땅을 딛고 한참을 걷다 보면 가공되지 않은 생각의 잔여물들이 땀과 함께 몸 밖으로 나가 마르면서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때부터 나는 충분한 더위를 가득 안은 채로 자주 걸었다.

 그렇게 걷고 걷다가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비어있는 곳이 여름으로부터 메워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그릴 수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름은 영원히 그림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