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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신 Jul 22. 2024

인생은 투쟁이다

<데미안> 서평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을 담은 책이다.

싱크레어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그의 가정으로 대변되는 선의 세계, 다른 하나는 크로머 패거리로 대변되는 악의 세계이다.

싱클레어는 선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악의 세계를 불쾌해했다.

하지만 그는 크로머 패거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과를 따게 되고 악의 세계에 한 걸음 발을 디딘다.

악의 세계에 속한 것은 아니나, 두 세계 사이의 접점에 서게 된 것이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타락'으로 불릴 수 있는 이 과정은 개인의 자아실현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정 세계에 속하지 않고 탈피했을 때, 혹은 접점에 있을 때 그는 두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두 세계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면에서 악의 속성을 발견한 싱크레어에게 이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가치관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가 진리라고 믿었던 세계. 

가족의 애정과 사랑, 도덕적 규율, 찬양과 찬송이 넘치는 세계가 더 이상 진리가 아닐 때, 그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데미안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파악하고, 내면에 몰두하여 스스로가 가치의 기준을 정립하고 스스로가 책임을 지며 정한 길을 나아가는 것.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데미안>이 출판될 당시는 1919년으로 1차 세계 대전 직후였다. 폐허가 된 도시와 삭막함.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보며 기존의 가치관, 선과 악의 구분의 무의미해지는 상황에서 헤르만 헤세는 개개인의 자아실현을 그 해결책으로 본 것 같다. 


자아실현을 이루는 개인들의 조화 언뜻 듣기엔 굉장히 이상적인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세상이 더욱 혼잡해지지는 않을까?

결국 스스로가 정하는 가치라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논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아닌가? 혹자는 책임을 기준으로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을 나눈다고 하지만, 책임 이상의 것들을 허용하는 사람,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기준이 가변적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책임에 근거한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 과연 사회의 병폐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 든다.


그러나 두 가지 과정. 즉 규범적 가치의 파괴와 자아실현은 분명 개인에게는 중요한 요소다.

우선 규범적 가치의 파괴를 통해 자기혐오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는, 이를 테면 선의 세계에서 살던 유년의 싱클레어는 종교적인 규범에 의해 자신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성경의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살아가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규범적 가치의 파괴로 이제 악으로 불리던 내면의 속성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를 밟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내면에 몰두하게 되면서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갈 때 나는 나와 친밀해지며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규범적 가치의 파괴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이고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스스로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우월한 사람이라는 의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존중. 이 두 가지는 그 당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들이다.


인터넷 방송이나 SNS. 요즘 현대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매체에서 중요한 요소는 타인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인간 본성이든 아니든, 기술의 발전은 시공간을 초월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근황, 일상 등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런 매체에서 타인의 시선, 반응에 크게 흔들리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도 언급하듯 자기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다.

타인은 나의 본질을 결정할 수 없다. 나의 가치는 오로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타인이 나의 가치를 결정해주는 것처럼 행동한다. 유년의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과나무에 손을 댄 것처럼 말이다.


물론 어떤 누군가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채 삶을 온전히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의 세계에 살던 유년의 싱클레어가,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고 가정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고 해서 크로머를 만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은 나의 현 상태와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다.

결국 다른 세계와 조우하는 날이 올 것이다. 


<데미안>에서 아쉬운 부분이라면 자아탐색, 실현의 과정과 방법이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기가 힘들다. '고독한 운명의 길을 걷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 자신에게 도달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종교 서적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몫은 아니며 각자의 삶과 환경은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길과 방법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표적이 있는 자들이라면 데미안과의 입맞춤의 순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투쟁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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