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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신 Aug 06. 2024

한 발의 화살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서평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이분법의 세계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의식과 윤리, 도덕 등의 영역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듯하다. 또한 세계는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작용한다.

남을 돕는 일, 배려하는 일,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선이다.

타인의 것을 갈취하는 일, 피해를 주는 일은 악이다.

그리고 이런 구분을 보증하는 이가 바로 '신'이다. 신은 단순히 기독교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선악에 대한 믿음의 근거가 되는 모든 형이상학적 실체, 그 모두를 통틀어 니체를 신이라 명명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다.

선악을 보증하던 형이상학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동물의 세계를 예로 들자면, 짐승들끼리 서로를 잡아먹는 것은 '악'이 아니다.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현상일 뿐이다. 인간이 동물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인간도 다를 바가 없다. 선과 악으로 지칭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해왔던 절대적인 가치의 세계는 허구가 된다.

여기서 허무주의가 찾아온다. 절대적 진리의 부재. 삶이란 목적도 의미도, 그리고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허무의 상황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정해진 목적과 가치가 없기에 인간은 오히려 능동적으로 변모한다. 

더 이상 정해진 목적이 아닌, 스스로가 삶의 가치를 창조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신이 명령하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닌, 스스로의 좋음과 나쁨의 원칙에 따라 가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삶을 차라투스트라는 노래한다.


삶의 정해진 목적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이 삶보다 낫지 않은가?'라며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과 무차별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충족하지 못해서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 돈이나 집 등의 물질적인 풍요 등을 원하지만 얻지 못해 그들은 좌절한다.

자살의 이면에는 삶을 향한 욕구들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것보다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투쟁하는 삶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의 삶과 고통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해 함부로 일반화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설명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삶에 대한 사랑을 위해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내 행동으로 발생한 일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무한히 반복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최선의 행동'을 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누군가와 대립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과 영원히 반목하며 사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화해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평생없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용기를 낼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최선의 행동'이란 바로 내가 창조한 가치에 기인한다.

이러한 영원회귀의 상황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을 선택할 사람이 있을까?


내가 창조한 가치는 나로 하여금 한 발의 날아가는 화살이 되게 한다.

나는 내가 세운 가치라는 과녁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간다. 단 한번뿐이기 때문이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은 '나' 하나뿐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경쟁 또한 무의미하다.

표면적인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제보다 더 나아간 자신이 중요하다. 

나와의 경쟁에서 나는 항상 승자다.

다만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라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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