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장하드 뒤지다 나온 옛 여행기 2 (2004)
내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3개나 끼어 있다고 한다. 사람 인생에 최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4개인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나 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이제 베트남에서 9년째 살고 있으니 역마살이 제대로 끼어있긴 하나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이들이 많다. 거창하게 인생을 들먹이며 휘황찬란한 말들이나 늘어놓으려는 속셈은 아니다. 다만 살아가면서 학교를 옮기든 집을 이사 가든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다음 사랑을 만나듯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딱 여행과 같으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삶을 살아가면서 한 아이의 부모가 되고, 가정을 이끌어가는 가장이 되어 가는데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봤을 때 재미나게 살았다고 회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은 해보았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까불어대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 닦듯이 조용히 집 주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돌아다니고 싶은데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아 떠나지 못하는 백성들이 있다.
떠나려는데 ‘여자 친구가 마음에 걸린다’, ‘아빠가 그러는데 다 큰 여자애가 멀리 나돌아 다니면 안 된다고 한다’, ‘여행 갈 돈이면 집안 살림에 보탤 수 있는 것들을 살 수 있다’ 등등 여행을 떠날 수 없는 1만 3천7백5십6가지의 이유들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나와 피부색이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하시지들 않는가? TV에서만 보고 고개 끄덕이며 만족하기에는 내 인생이 아깝지 않은가? 죽기 전에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맛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손짓 발짓을 해서라고 알고 싶지 아니한가? 주말 아침 어색한 PD의 내레이션으로 세계 곳곳을 보여주는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면 가슴이 뛰지 아니한가?
여행을 주저하는 이들을 어여삐(?) 여겨 일본과 캐나다에서 만난 젊은(?) 여행객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2004년 일본을 거쳐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면서 만난 분들이다.
내가 있던 도쿄의 호스텔은 한 방에 2층 침대가 4개가 놓여 8명이 함께 쓰는 곳인데 캐나다, 독일, 대만 등 각지에서 많은 여행객들이 묵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던 사람 중에 꽤 연로해 보이는 동양인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대만에서 왔다는 여행자하고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에 중국인이다 싶었는데 내 배낭에 있던 태극기를 보고는 한국말로 ‘한국 사람이네’ 하는 게 아닌가.
‘한국 분이시냐’고 여쭈었더니 그렇다고 하셨다.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되 여쭈었더니 ‘86세’라 하신다.. ‘그럼 도쿄에는 어떻게 오셨냐’고 되물었더니 인자한 웃음을 띄며 ‘여행 왔지 이 사람아’ 라 하셨다.
이번 일본 여행은 벌써 6번 째이고 신칸센을 기간 내에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구입해 일본 열도 남단 규슈에서부터 나고야, 교토, 오사카, 토야마,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여행 다니셨단다.
지난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이래 15년간 혼자서 동남아시아, 유럽,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등을 돌아다니셨단다. 76세 때에 30일간의 중국 여행 중 도연명이 넋을 잃고 바라보며 무릉도원이라 불렀다는 장가계(長家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여행 다니면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어려울 때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베푼 친절을 받으면서 세계인이 한 가족 같다’라는 할아버지께서는 ‘여행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편견을 깨뜨릴 수 있다’는 말을 해주셨었다.
다음 행선지가 어떻게 되시냐고 묻자 ‘얼마 전 시카고를 다녀와서 쌓인 항공 마일리지와 이번 일본 여행으로 생긴 마일리지로 무료 일본 왕복권을 받아다가 올 겨울에 다시 한번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며 아직 가보지 못한 남미를 내년에는 갈 생각’이라 하셨다.
여러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86세이시면 동네 어귀 한 바퀴 돌아다니시기만 해도 정정하시다는 말을 들을 텐데 혼자서 유스호스텔의 2층 침대에 묵으며 여행하다는 것이 참으로 입이 벌어질 일이었다.
도쿄를 떠나 밴쿠버에 머물면서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일이 생겼다. 한국에서는 추석 보름달이 밝게 떠올랐을 무렵 밴쿠버 유스호스텔에서 혼자서 미국 전역과 캐나다 전역을 여행하시는 62세의 젊은(?) 할아버지를 만났다. 두 달 동안 미국 전역을 둘러보고 이제 막 알래스카에서 돌아오셨다는 이 할아버지는 좀체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젊어 보이셨다.
캐나다는 한 달만 여행하고 귀국하실 거라는데 추석에 아들, 딸이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노부모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아버지, 할아버지 언제 돌아오시나 걱정하는 아들, 손자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4년 전부터 매년 3~4개월씩 꼭 배낭여행을 다니신다는 할아버지는 인터넷에서 직접 찾은 정보로 떠난 몽골 여행을 시작으로, 뉴질랜드, 호주 3개월 배낭여행을 마쳤고 네팔은 벌써 3번이나 다녀오셨고 히말라야 6000m까지 등정하셨단다.
한국에 있는 집에 계실 때면 매일 30분에서 1시간씩 영어 공부를 해서 간단한 의사소통만 하신다고는 하지만 알래스카에서 밴쿠버로 들어오는 배에서 만난 스코틀랜드 여행자들하고 술 집에서 술도 한 잔 하실 정도니 보통은 넘으시는 것 같았다. 또래 분들은 1주일 패키지여행만 다녀오셔도 한동안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하시는데 어지간한 20대보다 훨씬 활기차 보이셨다.
나이 50이 넘으면 무기력해지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지금 사회가 못마땅하시다면서 또래 친구분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시기 위해 여행을 결심하셨다고 했다. 알래스카에는 일자리가 넘쳐난다는 교민의 이야기를 듣고 조만간 알래스카에서 일하면서 살지도 모르겠다며 알래스카에서의 새로운 삶에 의욕을 보이셨다.
내년에는 어디로 여행하실 거냐고 여쭈었더니 아드님이 러시아 지사로 발령을 받아 아드님 보러 가는 겸해서 러시아 여행 가실, 거라고 했다. 내가 도쿄에서 만난 우영주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이 아직도 멀었다며 밴쿠버 시내 구경가야 한다며 호스텔을 박차고 나가시는 모습이 어찌나 씩씩하시던지.
자 이제 주절주절 말 많은 여행학 개론을 끝마치려 한다. 이 글을 읽고 ‘그럼 나도 60 넘어서 여행 다니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가슴 아플 따름이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떠나라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말은 하지 마시라. 내 인생의 여권에 비자는 발급받아져 있다. 당신이 떠날 일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