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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큼대마왕 Jan 04. 2024

슬기로운 주재원 생활
–10. 일가족 책임지는 소녀가장



해외 파견 나와 있는 주재원은 수영장 딸린 고급 콘도에 기사 딸린 차량을 제공받으며 편하게 지내는 줄만 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책임감 강한 사람들에게 해외 법인 근무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걱정거리가 많아 심리적 압박이 심각한 험지이다. 본사의 법인에 대한 기대치와 현지 상황은 큰 차이가 있는데 본사에서는 이해를 하려 들지 않는다. 현지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 내야만 하다 보니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과로로 사망하는 주재원들도 꽤 많다.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은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는 경우도 많아 낯선 환경에서 회사 일과 가정일 모두 챙겨야 하는 압박감에 고통을 호소하는 주재원도 많다. 


그래서 필자는 베트남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베트남이 편하다. 베트남 직원들이 다 알아서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제대로 일을 안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니면 베트남에 진출한 지 오래되어 우수한 현지 직원들을 잘 발굴하고 시스템을 구축한 실력 있는 회사에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주인 없는 회사에서 외유성으로 해외 근무를 나왔거나 전임자가 고생해서 쌓아 놓은 업적에 빨대를 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트남에서는 모든 것을 한국인이 직접 확정, 결재해주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베트남 현지 직원들에게는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일들이 많다. 그래서 아주 많은 것들을 결재해야 하고 직접 확인해주어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게다가 대체로 해외 법인이 본사 기준으로는 한 개 부서 만도 못한 매출을 만들어 내지만 베트남 현지에서는 말 그대로 ‘한 회사’이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다. 게다가 한국 본사에서는 수 십 년 동안 이루어 놓은 회사의 업력과 수많은 직원들 덕분에 잘 짜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지만 현지 법인은 모든 것이 맨땅에 헤딩하기 때문에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힘든 일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본인이 맡은 업무만 하면 되지만 주재원은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막중한 일들을 결재하고 처리해야 한다.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본사 유관 부서들로부터 쇄도하는 메일들이 하루에서 수 십 통씩 날아온다. 베트남 법인 자체에서 공유되는 이메일과 본사에서 날아드는 이메일까지 하면 하루에 확인해야 하는 이메일이 50통 ~ 100통이 된다. 필자 역시 ‘안 읽은 메일’이 매일 수 십 통 씩 쌓여 있어 주말에는 메일 확인하느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안 읽은 메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심한 압박감을 느낀다. 이 때문에 세심하고 신중한 사람일수록 베트남에서 근무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베트남에서는 모든 결재 서류를 종이로 보관해야 하다 보니 사람이 직접 손으로 사인해야만 한다. 직원들 급여 건도, 온갖 비용 결재 건도 종이 문서에 직접 사인을 해야 하고 은행이나 관광서에 제출해야 하는 문서는 2~3번 사인을 해야 한다. 물건을 수출하고 수입이라도 하는 회사이면 서류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 어지간한 주재원들은 한 달에 100번 이상의 사인을 하며 살아가는데 꼼꼼한 사람들일수록 베트남어로만 적혀 있는 서류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하느라 일은 더디게 진행된다.


 신흥개발국에서 근무하는 해외주재원들 중에는 절대 권력에 악인으로 돌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끝없는 책임감에 눌려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본사에서는 책임 추궁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해외법인의 직원들은 임원도 아니면서 임원이 해야 하는 책임감을 떠안으면서 ‘허술한 집안을 책임지는 소년 가장의 심정’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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