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감정의 이름을 바꾸는 일
엄마랑 연락하지 않은 지 햇수로 6년이 넘었다.
막내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아이가 이제 초등학생이 되니 말이다.
꼬물거리는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이 하나 없는데
엄마의 신세한탄을 30분, 1시간씩 들어주다보면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나의 너덜해진 마음으로는 아이들을 잘 품어줄 수 없었다.
스트레스는 나보다 더 힘없는 약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 됐다.
'그처럼 살지 않으려면 그를 보지 말아야겠다'
나는 평생 연락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살아있다는 것을 어림짐작으로 아는 정도면 되었지.'
굳이 내 옆에 속 시끄럽게 두지 않으리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너무 힘들게만 하는 사람이다.
날 감정 쓰레기통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엄마의 입 밖으로 쏟아져나오는 말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남처럼 살기로 결심했다.
연락을 끊고 해가 거듭할 수록 확실히 알았다.
'밖'의 엄마를 끊어낼 수록
'안'에 있는 엄마의 그림자가 짙어진다는 것을.
엄마에게 친절하지 못 한 사람은
남에게도 친절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독 첫째에게 과하게 엄격한데,
그에게서 (나를 보는게 아니라)
'엄마를 보는것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엄마를 닮았단 것이 아니라
'나의 일부인 엄마와 또 다른 나의 일부인 첫째에 대한 구분이 모호한건가?'
내 뇌는 지금 둘을 혼돈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쉽게 '나'와 혼동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의 주양육자와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뇌는 아마도,
나의 엄마와 나와 내 아이를 혼연일체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 감정의 쓰레기통도 아니고."
내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흔히들 쓰는 말이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그 단어에 힘을 실어주면서
단어가 오히려 나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단어는 설명이 아니라
방향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래서 감정라벨링을 잘해야한다.
엄마는 불쌍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고작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사랑만 주어도 부족할 자식에게 감정 쓰레기를 퍼부을만큼
엄마 주변이 당신에게 쓰레기만 주고 있는거다.
그런 사랑 말고는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내 머릿속 엄마에게 붙이는 라벨링을 바꾼다.
가엾은 사람,
세상 누구보다 먼저 연민을 느껴야하는 사람,
내가 친절하게 대해야하는 사람.
나는 엄마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살겠다.
하지만 애쓰진 않을거다.
그저 하고 싶은만큼만 친절하려한다.
시간이 지나 이 결심을 둘러본다면
이것이 엄마를 위한 일이 될지, 나를 위한 일이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아무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 삶의 유일한 책임자니까.
나는 친절하되,
사랑하는 나를 잃지 않는 거리에서 머무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