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작 드라마의 6부부터 기억한다는 것
엄마의 서문
몇 해 전부터 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 대신
아들러의 목적론으로 인간을 바라보려 한다.
인간은 그냥 살아가는 존재라는,
그 단순한 생각으로.
내 내면에 상처받은 아이가 그대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를 감싸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속삭였다.
'이쯤 됐으면 벌써 털고 일어났겠지.
그 아이도 인간인데, 까먹었겠지.'
오히려 원인론을 바탕으로
트라우마를 들먹일 때보다
아들러의 목적론으로
과거의 상처를 툴툴 털고 일어날 때
더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원인론으로만 보면
나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지울 수 없었다.
(사실 피해자가 맞더라도,
'매번 이 옷을 다시 꺼내 입어야 하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들러의 목적론으로 바라보면
조금 더 넓고 먼 시선으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또 '확증편향',
보이는 것이 전부고
인간의 사고는 우리가 배운 것만큼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들을 책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굳이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이유는 찾지 않을 거다.' 생각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이야기의 빠진 조각들.
왜 나는 할아버지의 동거인으로 등록되었을까?
왜 몇 년간 엄마의 동거인으로 살아야 했을까?
엄마와 아빠는 언제부터 함께 살기로 한 걸까?
그리고 더 먼 조각들.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
엄마는 왜 나를 낳기로 결심했을까?
우리 모녀의 결핍은 어쩌면 더 먼 과거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엄마랑은 연락해요? 연락해 봤어요?
엄마의 엄마는 살아있어요?
엄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필요했던 적은요?
엄마의 엄마를 언제 마지막으로 본거예요?
몇 장 없지만
옛날 사진이 있는 앨범을 뒤져도
그런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앨범 속 엄마는 어리고, 환히 웃고 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엄마의 어린 시절이나, 10대 때 모습은 없다.
그래. 원인론으로 살지 않고 있다고 해놓고서
과거의 이야기를 하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이 일의 원인'을 찾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이야기의 서문과 1장, 2장이 궁금한 거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원인도, 인과관계도 아닌.
어딘가로 쏙 빠져버린 앞부분.
내가 없던 시절의 엄마의 삶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나는 늘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이 정해둔 속도대로 본다.
감독이 관객을 울리기 위해
쌓아둔 장치를 외면하지 않고
그저 운다.
엄마의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한다면,
나는 16부작 드라마의 6부쯤부터 기억하는 것 아닐까.
앞선 1~5화가 궁금하다.
그러면 조금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