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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JI Apr 26. 2024

내면 아이에게 보내는 그림책 <아마도 너라면>

열일곱, 거센 시련 앞에 세상이 원망스러웠던 나에게.

첫 한 번은 아무 일도 아니란 듯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까진 아니어도, 삶에서 살짝 미끄덩! 하고 슬라이딩할 뻔! 했지만, 엉덩방아를 쾅! 찧은 건 아닌 정도라고 생각했다.


해가 바뀌기도 전에 가까운 사이였던 아이에게 구타를 당하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에게 이유도 모를 모함을 하는 건 견디기 어렵더라. 당시 주로 쓰던 인터넷 사이트의 메신저로 욕 메시지가 폭탄처럼 내 컴퓨터 화면에 떨어질 때는 영혼이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제일 친하던 아이는 자기 사정으로 가출. 내 베프 자리는 부재중이었고. 당시에 소꿉놀이처럼 하던 연애의 대상은 무슨 생각이었는지 또 다른 내 친구와 바람이 났더라.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부터 크게 사이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즈음은 거의 이혼 직전. 집안은 언제나 냉기가 가득 흘렀다.


'내 편은 어디에도 없나? 온 세상이 나를 끝의 끝까지 밀어붙이는구나.' 싶었던 시간이었다.



코비 야마다 글 / 카브리엘라 버루시 그림 / 이진경 옮김 / 상상의힘

밀쳐지고 밀쳐져 어딘가로 떨어진 같다. 낭떠러지나, 절벽으로 떨어졌어도 그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고민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은 없을까?     


학교를 그만둔 첫해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 내 방 안에서 영원히 머물러 살 거라고 생각했다. 

     

방구석은 내가 만든 나만의 벙커였는데, 남들이 봤을 때는 동굴 정도로 보였을까? 동굴에 겨우 숨어 지내는 동물처럼 미련해 보였을까? 지나고 생각해 보니 벙커도 동굴도 아니었다. 나는 잠수정에 탄 채 떨어진 거다. 망망대해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튼튼한 잠수정을 타고 떨어져 바다를 의지 없이 떠다닌 거였다. 하지만 동력 삼을 게 없는 잠수정이라 점점 깊숙하게 심해로 가라앉았다.     


궁금했다. 대체 내가 무슨 잘 못을 했길래 이런 시련이 나한테만. 왜 나에게. 어째서 나만. 하나만 닥쳐도 버거울 일들이 열일곱 살 나에게 두 개, 세 개 한꺼번에 나를 집어삼키는지. 원망스러웠다. 이럴 거면 낳지 말지. 이럴 거면 친한 척 먼저 말 걸지 말지. 이럴 거였으면 좋다고 따라다니지나 말지. 나는 왜 여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 


그럼에도 생존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만든 잠수정은 튼튼했고, 결국 삶에 대한 놓을 수 없는 무의식 속 의지는 잠수정의 동력이 되어 나를 뭍으로 끌고 와주었다.



정체성, 믿음, 사랑, 응원, 현존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만난 그림책 <아마도 너라면>을 읽으며, 열일곱의 내가 그 시간에 머물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납득하게 되었다. 


시련에 갇혔을 때, 어둠에 집어삼켜졌을 때. 삶을 살다 보면 그런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온다. 

하지만 그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진 이유는 버림받아서도, 약자라 도망쳐서도 아니었던 거다. 

아주 오랫동안 어두웠을 그곳을 환히 밝히기 위해 우리를 보낸 거다.


그 의미를 안다면 절망 속에서도 한걸음 디딜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버려진 것도 아니고 도망친 패배자인 것도 아닌 '단지 새로 심어진 것'임을 안다면 말이다.


그때의 나와 같은 누군가가 여전히 그 심해에 머물러 있겠지?

너 역시 네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무수히 많은 의문이 생길 거다. 네 눈에 비친 세상은 어디 하나 안전 한 곳도 없고 머물러야 할 가치가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나 큰 시련이 닥치면 방향성을 잃고 헤맨다. 네가 나약하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다.


네 존재는 분명 필연적임을. 네가 있어 이곳이 가치 있음을.

분명 열일곱의 나에게, 또 그때의 나와 꼭 같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너에게

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 시간에 심어졌던 것임을 이제 알고 있다. 

온 마음으로 전해본다. 계속 속삭일게. 네가 너무 놀라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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