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피부에 닿는 공기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순간 숨 막힐 듯한 공포가 밀려온다. 창가로 스민 옅은 빛무리가 이곳이 복도라는 사실을 겨우 밝히고 있다. 복도 한 면으로 창문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듯하지만, 두, 세 개가 겨우 보일 정도로 칠흑같이 어둡다. 시커먼 바닥에는 발바닥이 채 잠기지 않을 정도로 얕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 물이 발에 닿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감각적으로 혼란스럽지만, 이따금 희미하게 일렁이는 빛에 비친 물결을 보며 물이 흐르고 있다고 인식할 뿐이다. 이 막막한 상황에 매 순간이 점점 더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차단된 감각 덕에 도리어 엄습해 오던 두려움마저 점점 옅어진다.
정면으로 한 걸음을 내딛지만, 현실감 없이 내디딜 뿐이니 가중되는 혼란 속에서 정신만 더 아득해진다. 어두운 창가를 지나칠 때마다 어둠 속을 나아가고 있다고 여길 뿐이다. 모든 신경을 보는 것에 집중한다. 몽롱한 감각 속에서 시야마저 흐리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인 물이 첨벙거리고 불규칙한 물방울들이 비산하는 게 보인다. 내 발걸음에서 시작한 물결이 주변으로 퍼지다 다시 다른 곳들에 부딪혀 작은 물결을 만든다. 그 물결의 흐름을 이해하고 싶지만, 뚜렷이 보이지 않으니 크기와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 다양한 크기의 파장들이 서로 부딪히며 어둠 속으로 흩어지다 끝내 사라진다. 물결이 눈앞에 보이든 안 보이든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런 생각마저 그만두고, 변함없는 어둠 속을 걷는다.
알 수 없는 시간 속을 한참 걷다가 문득 흘러가는 물에 비친 찰나의 반짝임을 보고, 마치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에서 끄집어내듯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물결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작디작은 진실의 반짝임들이 물결을 따라 복도를 가득 메워가는 상상을 한다. 단지 머릿속에 존재할 뿐인 풍경이지만, 무감각한 현실보다 내가 기억하는 감각에서 뻗어가는 환상이 실재하는 현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어둠 속에 흐르는 물은 내가 볼 수 없고, 나를 봐주지도 않고, 나를 지나갈 뿐이니, 내 멋대로 현실을 규정해 보며, 다시 어둠 속을 걷는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이미 오래전에 잊었다. 바닥을 보며 걷다가 고개를 돌려 복도 한 면으로 나열된 창문 중 하나를 보니, 알 수 없는 형체가 일렁이듯 비친다. 아무래도 내 모습인 것 같다. 그 불분명한 형체를 보며 내 모습을 떠올린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물결을 상상하기보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낫다. 창가에 비친 나는 내가 걷고 싶을 때 나와 같이 걷고, 내가 보고 싶을 때 나를 바라봐준다. 지금까지 늘 혼자였는데,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끝없는 어둠을 따라 창가 속의 나도 같이 나아간다. 나는 만족한다. 이제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자극과 고통이 없는 이곳에서 잠시 잠깐 자신을 마주하며 나아가는 게 더 낫다.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이미 어둠과 다를 바 없는 몸으로, 어둠의 일부이자 어둠 그 자체가 되어 걷고, 또 걷는다.
2024년 0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