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둠 속을 걷고, 또 걷는다

by 응시하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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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어둠이 쏟아져 내려 눈앞의 세계를 지우고, 내 감각마저 쓸어간다. 엄습하던 공포도 겹겹이 밀려오는 무미건조한 정적에 삼켜지고,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이 고요한 절망에 잠긴다. 흐릿해지는 정신을 잡으려 하지만, 내게서 탈락하는 감각과 함께 정신을 잡으려는 의지마저 점점 사라진다. 나는 이 검은 세계에 있지만, 동시에 검게 지워진 존재다. 이 왜곡된 비현실에서 나라고 여겨지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주위를 둘러봐도 완전한 어둠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손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휘저어 보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마치 내 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공기의 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크게 소리를 질러봐도, 공허한 정적만이 흐른다. 어둠이 어둠을 응시하는 시간 속에서 내 안의 본능마저 하나둘 멈춰간다. 다만, 이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분명 비현실 속에 있지만, 기묘하게도 현실과 맞닿아 있는 듯한 감각이 스며든다.


마지막 의식마저 꺼져가는 순간, 어둠 저편에서 아주 작은 흰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둠을 계속 응시하지 않았다면, 놓쳤을지도 모르는 아주 희미한 빛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의지로, 저곳으로 가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자, 나라고 여겨지는 몸이 서서히 흰 점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감각이 일부 돌아온 듯, 어느새 걷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끝없이 길어지는 듯한 어둠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이제 걸어가는 것만이 존재 이유가 된 것처럼, 이따금 남은 의식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다가와도 끝내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어둠이 어둠 속을 걷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다. 작은 원이 점점 더 밝아지는 듯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조명 하나가 보인다. 조명의 은은한 빛이 주위의 어둠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다.


어둠에서 이어진 조명이 거울 하나를 비추고 있다. 미약하게 빛나는 거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거울 속, 시커먼 형체가 나를 노려보는 듯하다. 조금 더 다가가니 새까만 어둠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 윤곽이 드러난다. 얼굴에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지만, 칠흑 같은 눈동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다. 굳은 얼굴을 풀어보려는 듯,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본다. 생기 없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어색한 미소가 지어진다. 참 보기 싫은 모습이다. 조명 빛이 이목구비를 강조하니 우스꽝스럽다가도 무섭기까지 하다. 그 보기 싫은 얼굴을 외면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뜬다. 이번에는 얼굴 근육에 힘을 빼고,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이전보다는 한결 나아 보인다. 그렇게 가볍게 미소 지은 모습을 한동안 바라본다. 내 얼굴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지만, 이 정도 표정이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거울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내 모습이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겨가지만, 미소는 잃지 않는다. 계속 뒷걸음질치다 보니, 어느새 희미한 빛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끝없는 어둠 속에서 혼자가 된다. 어둠이 어둠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렇게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 채, 다시 어둠 속을 걷는다. 어둠 속에서는 어디든 같은 곳이니, 더는 목적지가 없다. 점점 더 짙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내 모습이 축소되듯 멀어지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깜깜한 밤이 이어지다 끝이 난 듯 눈을 뜬다. 어두운 방의 천장이 보인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살짝 미소를 지어본다. 어둠 속이든, 현실이든, 어디든 내게는 같은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저 걷고 싶은 만큼 걸을 것이다.


2024년 0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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