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 느낀 감정 하나가 서서히 마음속으로 가라앉으며, 빛을 머금은 시폰처럼 얇게 펼쳐진다. 이 감정의 결은 마음속 골짜기의 가장 깊숙한 바닥에 내려앉고, 이어지는 감정의 결들이 차곡차곡 포개어진다. 강렬한 감정은 그만큼 짙은 색을 내뿜으며 펼쳐지고, 층층이 쌓일수록 주변의 색까지 물들이기도 한다. 스치듯 지나가는 감정은 맑고 투명하게 펼쳐지지만, 짙은 색감의 결에 닿는 순간, 마치 눈처럼 녹아내려 사라진다. 그렇게 쌓여가는 감정의 결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결합하며 더욱 단단해지고, 마침내 내면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가끔 삶의 전환점이 될 만한 경험 속에서 느낀 감격은 은은한 빛처럼 부드럽게 퍼지며 결의 기둥에 스며들어, 독특한 문양을 남기기도 한다.
이처럼 내면에 쌓인 기둥이 자아의 근간으로써 자리 잡기 시작할 때는 크고 작은 감정들이 깊이 관여한다. 그러나 그 기둥이 현실의 사소한 현상들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자리 잡은 후에는 새로운 결이 쌓이는 빈도가 극적으로 줄어들뿐더러, 웬만한 감정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만, 그럼에도 이따금 가슴속에 큰 울림이 전해질 때면, 그 격정이 내면을 타고 돌며 따스한 바람을 일으켜 기둥의 뿌리까지 신선함을 불어넣기도 한다. 즉, 삶에 어느 정도 의연해진 후에도 기둥의 변화는 느리지만 꾸준히 일어난다.
하지만 사람의 생애가 유한하듯, 기둥의 변화에도 끝은 있다. 긴 세월 속에서 열정이 사그라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고고한 기둥을 감싸던 감정의 움직임도 점차 둔화하고, 기둥의 뿌리부터 서서히 식어간다. 변화가 줄어든 만큼 정적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미동 없는 마음속에 걸작이라 불릴 만한 정교한 기둥 하나가 남는다. 한 사람의 생애와 감정으로 쌓아 올린, 그 고유한 존재를 증명하는 사랑스러운 기둥이다.
나는 종종 내가 깊이 생각한 사람들의 기둥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내게 별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조용히 내적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그리고 그들의 기둥을 바라보며,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 감정을 그들에게 전할 순 없지만, 그들의 생애에 감동하여 그들의 바람이 잘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흘리는 눈물이다. 또한, 나는 공감 받을 수 없지만, 내가 아낀 사람을 공감하며, 그 감정으로 나를 감싸안으며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다.
나는 수동적이고,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 내가 멀찍이서 나마 누군가의 잘됨을 바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내게도, 그들에게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채 단지 바라볼 뿐이다.
2024년 06월 21일
2025년 0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