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기억하는 삶

by 응시하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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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을 지키기 위해 눈앞의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지워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향한 무수한 감각의 통로가 하나둘씩 메꿔질 수 있다. 단지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본능들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외면했을 뿐이라도, 단절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뿐만 아니라 외부를 향한 감정의 결까지 차단되어 관계에 필요한 감정이 급속히 사그라질 수 있다. 특히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관계가 주는 기쁨을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마음속에서 사람을 비워가야 하는 현실에 내몰리면, 단절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는 왜곡된 인식이 자리 잡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스스로 고립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에서 사람을 지우는 데 익숙해져,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쉽게 잊을 수도 있다. 타인에 의해 감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감정을 죽인 결과다. 이처럼 침잠하던 감정이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는 누군가의 말과 행동에 찔리고, 베여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변하기 마련이다. 처한 상황이 달라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에 대한 인식을 넓히다 보면, 잊을 수 없는 과거라고 해도 잠시 멀리 둘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 틈에서 본능에 따른 관계를 바라고 그러한 일상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관계에 필요한 감정이 성숙하기는커녕, 관계에서 오는 감정의 메아리조차 느끼지 못한 채 감정을 죽여온 시간은 그렇게 간단히 덮이지 않는다. 관계를 이어가려 애쓸수록, 오히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결점들이 드러나 후회가 깊어질 수도 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익숙한 고립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능을 조절한다고 하여 본능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감정을 죽인다고 하여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쉽지 않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접고 접은 감정을 다시 펼칠 수도 있다. 나는 운 좋게도, 내 감정을 조심스럽게 받아준 삶에 성숙한 연인을 만나 다시 마음을 펼쳐갈 수 있었다.


본능만이 꿈틀대던 시기를 지나 제어할 수 없는 호르몬의 농간을 넘어서 더욱 깊은 본성을 마주하며,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갈 태도를 갖출 때까지 연인은 나를 기다려줬다. 그렇다고 해서 연인과 내가 감정을 나누는 방식이 같진 않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같은 방향을 떠올릴 만큼 본능적인 끌림이 있지만, 감정의 구조도, 이해의 방식도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서로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대의 감정을 들여다볼 뿐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담긴 마음은 드러내 보이지만, 구깃구깃한 감정은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 감정은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렵고, 나도 상대가 원치 않는 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거운 감정이다. 혼자 조용히 그 부서진 잔해를 꺼내 볼 뿐이다. 지금도 감정을 죽인 후유증이 남아있다. 여전히 사람을 잘 잊는다. 이름을 잘 까먹고,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한동안 자주 만나며 상대의 얼굴을 뇌리에 남기더라도 그 기억이 언제까지나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도, 기억해 내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과는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함께 지낸 과거의 기척만을 기억한다. 그들에게 받은 온기를 기억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작은 온기를 전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고, 잘 만나지도 않다 보니, 관계에 서툰 만큼 감정적으로 세심하지 못할 때가 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다가오지 않으면 멈춰 서 있을 뿐인 미숙한 인간이다. 그래서 내 삶은 여전히 관계를 바라본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정서적으로 깊은 관계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린다. 참 인간적이고 딱한 행복이다.


지금 나의 바람은 한 가지다. 내 기억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종언에 이르기 전에,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내가 보고 싶은 모습으로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현실에서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시기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생김새도 떠올리지 못할 것이고, 이름조차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재했다는 것만은 기억할 테니,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남길 것이다. 그게 나의 첫 번째 죽음이다. 모두가 떠나고, 기억도 떠나고 나면, 나만 떠나면 된다. 나는 보살필 사람이 없으니, 무책임할 수 있어 좋다. 그렇게 내 감정을 잊어가며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 바라는 조용한 결말이다. 다가오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나는 이 바람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나의 삶은 기억하고 싶은 삶이었다.


2024년 0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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