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등불을 오랫동안 바라본 후

by 응시하는사람
num45_essay_1.jpg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 모습에 끌리면 깜깜한 마음속에 그 사람에 대한 등불이 하나 켜진다. 광활한 어둠 속에 금세 삼켜질 듯한 작은 불 하나다. 그래서 그렇게 꺼질듯한 불을 살리기 위해 내 마음에 불을 밝힌 상대에게 나를 위한 기대를 품어간다. 내 말을 들어주길 바라고, 공감해 주길 바라고, 끝내 내가 원하는 형태로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 오직 나만을 위한 기대다. 그러다 보니 그 조그만 등불은 어느 순간 조용히 꺼지고 만다. 세상에 나에게만 유효한 관계는 없다. 등불은 내게 켜지지만, 내게만 켜진 등불은 빠르게 소실한다. 서로를 향해 등불이 켜지거나, 적어도 상대에게 나를 향한 등불의 흔적은 있어야 내게 켜진 등불도 유지된다. 물론, 두 사람의 등불에 같은 의미가 있진 않다. 서로가 지닌 등불의 개수도 다르고, 각 등불에 대한 마음가짐도 다르다. 서로 등불의 밝기를 맞춰가도, 마음의 크기가 맞춰지지는 않는다. 둘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기대치도 다르다.


그렇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상대가 내 기대에 호응하길 바랄 수 있다. 상대와의 관계를 놓지 않겠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기대는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에, 둘의 기대가 엇비슷하면 순수하게 서로의 기대를 채워 가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가 생각하는 감정의 무게가 다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감정이 쌓이는 양도 다르다 보니, 그 감정의 혼란을 조절하는 과정에서 상대에게 큰 부담을 안길 수도 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잉된 감정을 드러내거나, 기대가 조금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을 억누른 모습을 보여 관계에 금이 갈 수 있다. 나름 길게 이어져 온 관계도 허무하게 끝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게서 나에 관한 긍정 의사를 확인할 때, 상대보다 내가 가진 기대의 크기가 더 깊고 기대의 속도가 더 빠르면, 상대의 의사를 존중한다. 반대로 상대의 기대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 보인다면, 내가 부담되지 않는 선까지 거리를 둔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삶의 흐름 속에서, 때로는 내 기대를 충족하려는 태도가 상대에게 부담될 수 있고, 상대의 기대에 호응하려는 태도가 나 자신에게 부담될 수 있다. 결국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대에게 조금 더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나만 이 관계에 깊이 고민한다고 해도, 나를 위하는 시간으로 여길만한 정서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상대는 애초에 별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이 관계를 가볍게 여기진 않아도, 나만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변화하는 관계의 흐름 속에서 서로가 놓인 상황에 맞춰 기대감을 조절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나를 위한 감정 조절보다,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를 위해 내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더 버거운 일일 수도 있다. 끝내 혼자 외줄을 타는 식으로 관계를 고심하며 마음속을 헤집다가, 내가 바라보려고 했던 등불이 이토록 작고 초라한 것이었나 하고 느낄 수도 있다.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속 등불을 하나씩 끌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잊어가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 있다. 혼란에서 벗어나 나에게 몰입하며, 그동안 정리하지 못한 삶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꿔가다 보면 의외로 간단히 평온을 얻을 수도 있다. 그동안 내가 얽매였던 관계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관계 속에서 더 가볍고 일상적인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만족을 얻든, 내가 접어둔 관계로부터 마음의 안정을 바라는 갈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대개 생활 환경이 변하거나 바쁜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현실에 몰입되어 거의 잊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만의 안정을 찾고 난 뒤에는 다시금 꺼져버린 마음속 등불을 밝히려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바라는 상대를 매번 새롭게 기다리기보다 이미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살리고 싶어질 수 있다. 내가 좋게 여기거나 나를 좋게 여긴 상대와의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면서도, 그 과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상대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상대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어려운 관계를 반복하며 존재론적 죽음에 한발씩 다가서고 있다. 이미 그 고요함 속에서 모든 관계의 끝을 예감하며, 마음은 깊되 겉으로는 가벼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적어도 내게 있어 관계에서의 존중과 배려는 호감을 느낀 상대에게 전하는 조심스러운 호의이지, 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는 아니다. 이는 있는 그대로 두고 보고 싶은 내 마음이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놓지 않았지만, 마치 이미 놓아버린 사람처럼 내 의사와 무관하게 멀어지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결국 관계란 내가 먼저 사라지거나, 상대가 먼저 사라지는 때를 기다리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정서적으로 감당 가능한 만큼만 그 흐름을 음미하며 지낼 뿐이다. 나는 그래도 좋다. 그렇게 끝난 관계는 그 자체로 끝이지만, 그 관계를 이어온 과정에서 느낀 마음가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한 내 일부로 남을 테니, 나는 그래도 좋다.


따라서 실망하지 않고, 아쉬워하지 않고, 그것대로 좋았던 경험으로 기억한다. 등불이 켜지고, 꺼지는 그 깜빡임을 기억하며 입꼬리를 올릴 뿐이다.



2024년 08월 25일

2025년 04월 10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은 자가 기억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