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한 바람이 세상을 훑는다.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구름 떼는 겹겹이 부딪혀 밀려가고, 거북한 소음에 이끌려온 두터운 먹구름이 세상을 한층 더 어둡게 물들인다.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우레와 함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짙은 남색 바다의 육중한 파도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해무 속에서 정신없이 부딪히며 전율한다. 공기를 찢을 듯한 바람은 비산하는 파도 입자조차 잘게 쪼개어간다. 소용돌이치는 폭풍우를 향해 검은 하늘이 빨려 내려가고, 어둑한 해무가 말려 올라가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러던 어느 순간, 폭풍 속에서 손바닥만 한 빛줄기 하나가 뻗어 나와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 위를 비춘다. 세상의 질서에서 벗어난 듯한 찬란한 빛 무리다. 그 빛이 집중된 수면은 점점 새하얗게 물들고, 주변 범위까지 점차 밝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를 향해 빛을 내리쬐는 빛덩이 하나가 검은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떠한 파괴적인 현실도 고요하게 하강하는 빛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빛덩이가 바다를 향해 내려가고, 그 빛에서 쏘아진 빛줄기가 수면 아래 심연까지 뻗어 어둠을 밝힌다. 어두운 바닷속을 밝히는 광원 주위로 물고기 떼가 춤을 추며 반짝이는 비늘을 뽐낸다.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 물결을 따라 더 많은 생명이 물살을 가르며 모여들어, 다시없을 화려한 순간을 유영한다. 빛의 구체는 그런 그들을 지나 어느새 수심 깊은 곳을 향한다. 표층의 생명은 빛에 이끌려 내려가다 끝내 돌아선다. 광활한 어둠 속으로 점처럼 작은 빛이 내려가고, 바닥에 닿은 빛줄기도 점차 짧아진다. 해저의 생명은 이 빛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빛을 감지할 수 없는 생명은 빛을 알지 못한다. 결국, 가장 깊은 곳에 빛의 구체가 내려앉는다. 어두운 심연에 처음 도달한 빛이다. 이 빛은 어느 순간 나타나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난 채 가장 깊은 어둠을 밝히며 일정하게 나아갔고, 이 빛을 바라본 생명은 단지 본능에 따라 빛이 보인 순간 반응하고, 지나간 순간 잊었다.
외부를 향한 감각들은 빛을 반기지만, 빛이 지나가면 금세 잊는다. 심층의 감각들은 그 빛이 다가와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삶의 매 순간을 살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낸다. 누구나 지난 삶에서 자신만의 가슴 충만한 기분을 느꼈지만, 일상에서 좀처럼 떠올리지는 못한다. 특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면, 완전히 잊힌 기억에 불과하다. 예측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불안한 현재를 견디고, 후회스러운 순간을 떠올리다 보면, 단지 작은 기쁨조차 좇기 버거울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삶도 결국, 사람의 삶이다. 마음이 휘청이면 지금을 살아가는 내 본능이 그렇게 느끼기에 감정적인 무력감에 휩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존재와 가치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이제 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는 내가 경험한 꿈만 같은 순간이 기억으로써 존재한다.
물론 현재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마음속 개념일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새까맣게 그을린 시간 속을 떠도는 마음을 가만히 품고 싶다면, 어쩌면 자신이 가장 몰입하고 싶은 그 순간의 빛을 원하는 만큼 꺼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빛이 사랑에 대한 기억이든,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든, 말로 꺼낼 수 없는 욕구이든, 어떤 바람이 깃들어 있든 무관하게 자신이 진정 바란 순간이라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수면 밖을 향해 작은 빛줄기 하나를 서서히 뻗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빛이어서 삶에서 그 빛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빛은 사람이 가진 가능성의 기원이기에,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 빛과 함께하는 삶일 수 있다. 이 광대한 세상에서 나 자신은 아주 작은 한 사람이지만, 그 몸을 일으키는 긍정적인 의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이상, 하나의 빛을 향한 긍정의 삶을 살아가는 여정일 수 있다.
검은 바다 위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축을 흔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며 격랑을 일으킨다. 끝없는 폭우가 쏟아지고, 검게 물든 하늘이 세상을 가르는 굉음을 따라 점점 더 어둡게 물들어간다. 그러나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든, 마음속 단 하나의 빛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위를 밝힌다. 살아있기에 존재하는 이 빛은 오늘도 내 심연을 조용히 품어 올린다.
2024년 08월 28일
2025년 0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