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개 속 언덕을 걷는다

by 응시하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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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가 언덕을 삼키려 들지만, 번번이 흘러내린다. 부유하는 안개 바다 위로 파도가 굽이친 듯한 능선이 솟은 채 시야 밖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나는 그 휘어진 능선 위의 낙엽수 길을 걷는다. 희미하게 비치는 태양은 정오를 지나 서서히 기울어간다. 샛노란 햇살은 희뿌연 안개에 겹겹이 가로막혀 주황빛으로 산란한다. 길을 걷는 내내 안개 속에 빛이 일렁이는, 꿈같은 풍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따금 안개 바람이 굽은 능선을 따라 솟구치면, 낙엽수의 잎들이 흩날리며 떨어진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잎들이 젖은 길 위에 눌어붙고, 겹겹이 쌓이며, 썩어간다. 수북한 잎을 밟으며 걸어갈 때마다, 짓눌린 잎들이 찢어지며 축축한 흙바닥을 파고든다. 그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다. 종종 때맞춰 옅어진 안개 사이로 진한 햇살이 스며들면, 떨어지는 낙엽의 질감이 투명하게 드러나 생의 흔적이 은은한 빛을 머금은 듯 보인다. 마음속에 눌려 있던 오랜 기억이 살며시 떠오를 만큼 고요한 빛이다.


그렇게 나에게로 빠져들 때면, 어릴 적 친구들과 웃음 짓던 순간, 배움의 희열을 느끼던 시간, 감격스러운 날을 위해 작은 성취를 모아가던 날들, 본능에 취해 작은 만족을 쫓던 시기, 감정적 일탈 속에서 무너진 인간성에 연민을 느끼던 기억, 유한한 시간 속에서 끝나가는 사랑이 가슴을 파고들던 때가 머릿속에 포개어진다. 내가 선택한 길을 걸으며 언덕을 올랐고, 그 가파른 높이를 홀로 걸을 때 다가오는 불안을 다잡는 과정에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길을 걷지만, 이 습한 공기로 숨 쉬는 것도, 잎을 밟고 나아가는 것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길을 걸을수록 고저 차가 커지는 능선과 점점 더 쌓이는 잎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디디게 된다. 결국, 이 길을 걸으며 내가 변했다고 믿었던 순간들은 내 안의 풍경을 살펴본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처럼 나를 알게 되면서 더욱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옮기는 법을 배웠으니 그것도 변한 거라고 할만하다.


본능을 좋아하지만, 거기에 휘둘리거나 이기려고 애쓰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감각을 조율하며 바라보는 데서 삶의 흥미를 얻는다. 인정받고 싶지만, 필요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변화 속에서도 내 방식대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데서 만족을 느낀다. 그렇게 나를 우선으로 두고, 내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길을 걷는다. 그래서 고통은 없지만, 고독은 따른다. 일부러 낙엽에 미끄러질 수도 있다. 굽은 언덕 아래로 굴러 자욱한 안개 속으로 떨어져도, 내가 살아있는 현실을 변치 않는다. 단지 짙은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으려고,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거나 소유하려는 시간 속에서 현재의 고요가 사라질 뿐이다. 지금보다 덜 외롭고, 더 물질적이고, 더 시끌벅적한 길일 것이다. 지금 내가 걷는 길과 달리, 본능에 더 충실하면서도 균형 잡힌 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길을 가든 자기만의 언덕 위엔 혼자 도달하게 된다.


대개 자신만의 언덕에 올라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길을 이야기하곤 한다. 언덕에 오르면서 느낀 점에 대해 공감이나 인정을 얻기 위해서, 새 배움을 얻기 위해서, 또는 불안한 이들에게 불안 너머를 알리기 위해서 자기만의 길을 이야기한다.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태도를 논하며, 저마다 다른 삶이 비슷한 앎에 이르는 공감대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존중하고, 경외하고,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는 시간 속에서 자기 삶이 지닌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나 내 길은 굽은 능선을 따라 안개 속으로 이어질 뿐이다. 나쁜 길은 아니지만, 말할 거리가 없고, 더 나은 가치가 드러나지 않기에 나빠 보이기도 한다. 이런 길은 같이 걸어보거나, 궁금해할 사람도 드물다. 나만 좋으면 된 길이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러다 보니 내 언덕 위를 걷다 보면 안개 바람이 솟아오르고, 젖은 잎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런 풍경을 마주하고 싶진 않지만, 사람과 사회에 애증을 느낄 때마다 종종 바람이 불어 든다.


나는 내 길이 좋다. 저마다의 언덕에서 내 언덕을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며, 내 길의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도, 아쉽게 여기거나 위로하는 마음도 이해한다. 내가 바라보고, 나를 바라보는 건, 나를 비추는 낙엽뿐이라, 타인에 대한 기대가 적어서 인지 어떤 시선도 이해가 된다. 그렇게 이해하고서 나는 기울어진 희미한 태양을 바라본다. 안개 속 주황빛이 일렁이는 길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빛을 향해 걸어간다.


2025년 07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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