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삶에 대한 만족을 추구하며 결핍된 정서를 채우려는 방식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향한 인적·사회적 반응에 따라 고유한 윤리관이 조정된다. 나 자신을 신뢰하기 위해 현재 윤리관을 지키는 과정에서조차, 오히려 잠재된 본성을 무의식 중에 추종하게 되어 내 윤리관에 대한 해석을 달리 적용하기도 한다. 인간사의 흐름이 지닌 영향력에서 벗어나, 타협과 왜곡을 반복하며 스스로 살아내기 위한 윤리관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욕구 실현에 따른 반응을 감지하고 예상하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주변의 수용성에 따라 자기 삶에 고유한 윤리적 가면을 만들게 된다. 이 가면은 외부 세계를 향해 내 욕구를 감추거나 드러내기 위한 통로로, 그 표층에는 사회가 분류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본능과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이 자리하고, 그 아래에는 인지할 수도 있지만, 숨기고 싶은 욕구가 자리한다. 이 외에 사회가 분류하지 않았거나, 지금 분류하고 싶지 않거나, 인지하지 못한 욕구는 깊이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대개 살아가는 동안 본능적으로 통용되는 욕구를 적극적으로 혹은 은근히 드러내 보이며, 나와 어울리는 관계를 맺고 끊으며 삶에 대한 충만감을 얻는다. 그리고 무의식에 잠재된, 건드려선 안 될 것만 같은 심층 욕구를 멀리하거나 굽어살피며, 내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준으로 삼는다.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내가 어떤 욕망에 대해 어느 정도 깊이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마다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 자기 윤리를 실현하기 위해 가까이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거나, 그 선을 넘어 자기 윤리를 극복하기 위해 멀리하고 싶은 것에 중독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는 자기 삶을 관철하며 살아내는 살인자, 착취하여 만족하는 교육자, 이득을 위해 선의를 베푸는 권력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무의식이 형성한 윤리관에 따라 특정 욕구를 교묘하게 가리거나, 무분별하게 쏟아내거나, 자신을 이겨내기 위한 원천으로 삼으며 '사람'답게 살아간다.
나는 사람을 잘 모른다. 나에게 몰입하거나 소수와의 관계 속에서,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을 때 비로소 다가서고 싶은 대상일 수 있음을 알았다. 그렇기에 멀리서 좁은 시선으로 겉을 바라보니 사람을 잘 모른다. 사람을 보고 쉽게 판단하지 않기에 급속히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판단하지 않다 보니 의미 있는 관계로 더 진전되지도 못한다. 사람에 대한 상처와 두려움이 많다 보니, 누군가가 나에게 거리를 좁히면, 그렇게 허용한 만큼만 다가서고, 대상이 사라지면,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내 무의식 표층에 자리한 윤리관에 따라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이 타인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치지 않는 이상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선별적인 절제를 통해 나만의 윤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지만, 부정한 것에 노출되면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적당한 혼탁은 수용하되, 고착된 무분별한 정서는 경계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아끼는 사람이 순수한 선을 지향하면, 나 역시 편안하게 순수한 선을 따른다. 혹은 어느 정도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비도덕적인 의사를 실현한다면, 나 역시 그 정당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선 그럴 수 있다고 여기거나 동참한다. 나는 역사가 규정한 도덕을 순순히 따르기보단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도덕을 내 윤리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리고 정서적 안정과 관계적 기호에 따라 허용할 수 있는 비윤리를 판단한다. 그리고 나의 정서 안정을 열어준 사람에게는 나의 논리나 관념을 가져다 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든, 앞으로 무분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의 맑은 천성과 본성을 기준 삼아 수용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나에 대한 신뢰를 저버려도 이해하게 된다. 반면, 내가 부정적으로 인식한 대상에게는 높은 기준을 세우고, 그 선을 넘는 순간 철저한 무관심 속으로 격리하게 된다.
결국, 나의 윤리는 초월적 이상이나 불변의 도덕을 향하지 않는다. 선과 악을 명확히 단정 짓지 않고, 순수함과 악함을 구분하지 않는다. 자기 중심성과, 지금껏 내 삶을 수용하며 줄여온 만족이, 나 자신과 외부로부터 파괴되지 않도록, 정서 안정이라는 작은 피난처를 향해 있다. 나약함을 어루만지는 나만을 위한 윤리다.
2025년 06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