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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Sep 21. 2023

긍게 사람이제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읽은 책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저자 : 정지아

출판사 : 창비 (2022)

작성 일시 : 2023년 9월 21일 오전 11시


어쩌다가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갔는데, 자리에 앉아서 밤늦게 까지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착한 어른도 이미 잠자리에 들었어야 할 시간까지, 앉은 자리에서 책을 완독했다. 남의 장례식장에서 잠을 잘 수야 없지 않은가? 내일 좀 더 피곤하고 말지.

‘뭐라도 써야겠다.’ 

이왕 틀려먹은 잠, 글이라도 쓰려고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나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할 말이 없는건가? 아니었다. 수많은 할 말들이 서로 자기 주장을 하기에 무엇을 말하기가 곤란해진 것이었다. 결국 나는 잠을 택했다. 그 모든 할 말을 다 풀어내기는 벅찼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겠지.

그렇게 잠은 감정의 폭풍을 거두어 갔다. 아니 감정들이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았다. 문득 후회가 올라왔다. 어젯 밤, 그 순간에만 할 수 있는 말들이 있었을텐데 그걸 다 놓친 것 같았다. 비록 감정으로 범벅이 되어서 아침에 다시 읽기는 거북하겠지만.


그러다 문득 “긍게 사람이제.”(138)하는 말이 떠올랐다. 소설 속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아! 사람들이었구나. 어제 밤,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모든 말들은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다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이 책은 화자인 고아리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아리의 아버지인 고상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장례식장에 왔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마음 속에서 툭 튀어오르듯 솟아오른다.

아,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라는 건 딱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 주변 사람들까지 말하는 거구나. 나는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까지구나. 새삼스러운 진리가 새롭게 깨달아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고상욱의 삶은 어떻게 보면 평생 당하고 산 바보같은 삶이다. 동네 머슴처럼 살며 다른 사람에겐 다 내어주고, 가족들은 희생당하게 하는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처럼 보인다. 배신하고 실수하는 사람들로 부터 내 것을 지키고 계산(51)할 수 밖에 없는 고아리와 같은 사람으로 부터는 의문과 분노, 그리고 냉소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다. 그는 패배한 사회주의자로서 낙향했다. 시골 출신이지만 농사를 책으로 배워서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말로는 “사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고아리는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사회주의는 우습고 차가운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회주의 신념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풀어진다. “하염없이”(49)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앞에서 “오죽흐먼”(102)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죽어간 동지들과 함께 목심을 걸었던(61) 것은 차가운 사상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때문이었다는 것. 그런 마음으로 적이었던 청년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 이후로도 쭉 살아가게 해준 것이었다. (179)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묵묵하게 견뎌내주고, 오죽흐먼 오죽흐먼 속이 썪으면서도 그런 말은 일체 꺼내지 않는. 죽음으로 까지도 사람들의 풀어지지 못한 마음들을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한건 빨치산이라는 낙인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한 다 하지 못한 속죄의 의미이지 않았을까?

소설의 말미에 고아리는 문득 아버지는 떠났지만, 자기 곁에 인연 둘이 머무는 것을 보게 된다. (265) 이해할 수 없었고, 떠나고 싶었고, 마음 속에서 멀리 있던 아버지는 문득 자기에게 많은 것들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마음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기억됨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민중을 해방시키기 원해서 사회주의자로 빨치산으로 산 속에서 목심을 걸었고, 그것이 실패하자 그 모든 것들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자기 운명을 짊어지며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도왔고, 결국 그를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며 마음 속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된 고아리의 사랑을 통해 해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고통이 세월에 씻겨가긴 하나, 그 세월은 누군가의 한 평생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고통은 점점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이상한 방식으로 머물러 있기도 한다. 여전히 원수이면서도 형동생을 맺게 되기도 하고, 전처의 동생과도 껴안을 수 있는 이상한 관계가 용인되게도 한다. 이런 얽히고 섥힌 인생의 모습들은 어쩌면 반드시 풀어내어야만 하는 매듭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무를 감아 오르는 덩굴이 함께 살아가듯 그렇게 때로는 고통의 자리에서, 때로는 공감의 자리에서 그렇게 함께 머물러 생명을 이어가는 숲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고 모순적이지만, 뭐 워쩌겠는가?

“긍게 사람이제.”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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