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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Oct 17. 2023

뼈 맞는 기쁨

김영민의 [공부란 무엇인가]를 읽고

읽은 책 : 공부란 무엇인가

저자 : 김영민

출판사 : 어크로스 (2020)

작성 일시 : 2023년 10월 17일 (금) 오전 10시 30분




나는 혼나고, 뼈 맞는 것을 좋아한다. 귀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그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진다. 나에게 그런 경험을 시켜줄 사람들은 영원히 내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귀하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다. 간혹 가뭄에 콩 나듯 누가 나에게 뼈 때리는 말을 한다면, 나는 그가 나를 최대한 아프게 때릴 수 있도록 마음을 움직여서 가장 아픈 곳에 맞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맞으면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해서 성장과 성숙을 향해 걸을 수 있는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어른이지만, 그도 자신을 객관화시키기 어려울 때는 항상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김영민 교수는 나에게는 귀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가 자세를 고치고 앉아서 집중해서 읽었다. 신나는 타골 대잔치가 펼쳐졌던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많이 비겁해진 내 모습과 비교했을 때, 저자의 시원시원한 주장이 너무나 눈부시게 보였다. 특히, 상대를 존중하기 때문에, 상대를 비판하고(210), 상대의 논의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해야 한다는 주장은 크게 반성할만한 포인트였다. (221) 이제껏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해야 할 말을 다 하지 않은 것은 결국 상대를 존중하지 않았던 것에 불과했다는 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이 점에서 김영민 교수는 나보고 성장하라고 혼을 내주는 어른과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사람들을 성실하게 돕고, 가르치기 원하는 마음을 가졌다. (255) 사회라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젠틀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 진지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깊이도 있을 뿐 아니라, 위트(34)까지 있는 사람.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을 그르다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이 있는 사람. 내 마음속 스승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다.


책을 처음 열었을 때 ‘프롤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저자에게 반했다. 첫눈에 반했다. 그 부분 전체를 필사했을 정도다. 한국의 상황에서 ‘공부’란 무엇인가를 물어가야 한다는 말을 부담스럽지 않은 말투로, 하지만 정확한 포인트에서 말하고 있다. 경쟁을 해서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세태에서, 학점이나 결과만 중요해지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과연 공부란 무엇인가? 저자는 그 질문을 통해서 사회와 학교를 위트 있게 꼬집을 뿐만 아니라, 좋은 선생으로서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들을 공유하고 있다.


이 책은 목차가 잘 구성되어 있다. 목차를 읽어보면 이 책의 뼈대를 볼 수 있다. 각 챕터마다 쓰인 그들에는 제목과 부제가 달려 있어서, 그 글이 어떤 글인지를 가늠하기 쉽다. 목차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1부는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선 정확한 단어 사용 법, 글을 쓰는 법 등을 다룬다. 2부에서는 공부를 하면 얻게 되는 것, 유학, 체력, 연구자의 태도를 다룬다. 3부는 실제로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독서와 서평, 자료정리, 질문하는 법을 말하고, 4부에서는 연구자로서 타인과 소통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말한다. 5부는 그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이 책은 에세이 모음집 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내가 공감했던 부분을 몇 군데 발췌해 오려고 한다.


모순 혹은 긴장으로 가득한 자신의 존재를 그럭저럭 거두어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일이며, 자신의 모순이나 긴장을 빙자하여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시민의 덕성이다. 제대로 봉합되지 않은 모순이나 긴장이 출구를 찾다가 간혹 눈부신 예술을 낳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우는 한 세대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드문 일. 관리되지 못한 개인의 모순이 무절제하게 사회에 분비될 때, 그것은 대개 민폐일 뿐이다. (37)


친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내가 내 똥을 친구에게 퍼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 친구도 나에게 그렇게 하긴 한다. 서로 똥칠을 하면서도 잘 받아주는 걸 보면 우리는 좋은 친구 사이인 건 맞다. 하지만 이 단락을 보면서 ‘시민의 덕성’을 친구 앞에서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앞이라고 풀어져서 아무 말 대잔치를 일삼을 것이 아니라, 정제된 언어로 선물과 같은 말들을 하는 노력들을 더 한다면 나도 그도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럴진대, 누군가 어떤 대상을 향해 너무 과도한 일반화를 일삼는다면 혹은 너무 흐릿한 언어를 동원하고 있다면, 혹은 지식을 떠먹여 준다는 명분하에 너무 쉬운 말만 늘어놓고 있다면, 듣자마자 쉽게 이해가 가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면, 잠깐의 공부를 통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약을 팔고 있다면, 이는 거의 반 사회적 행동에 가깝다. 이 공부를 하기만 하면, 혹은 이 책을 읽기만 하면, 당신의 허약한 기력은 보충될 것이며, 정신적 기갈은 멎게 될 것이며, 거친 피부가 윤택해질 것이며, 미세먼지로 시달린 심폐는 활력을 찾을 것이며, 무분별한 젊음의 열독이 풀어질 것입니다… 운운. 이 음식을 먹으면 온갖 잡병이 다 낫는다는 식으로 광고하는 식당에 들어가면 얼른 뒤돌아 나와야 하듯이, 이러한 지식의 광고를 보면 빨리 도망쳐야 한다. (85)


SNS를 하다 보면, “40살이 되기 전에 꼭 읽지 않으면 자자손손 노숙자로 살게 되는 책 3권” “소신발언 합니다. 내 똥은 굵습니다.” “이 글을 읽어봐 넌 행복해지고” “흙수저인 내가 한 달에 2조씩 벌게 된 비법”라는 식의 글들이 있다. 내가 체감하기로는 도움이 되는 핵심을 잘 정리한 글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글이 비율상 더 많다. 그래서 그런 글들은 읽지 않는 편이다. 내가 이런 글을 썼다면 권위가 없었을 텐데, 저자가 말하니 설득력이 더해진다.


미칠 능력이 없어서 그저 건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나, 미치는 게 속 편해서 늘 미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다가갈 수 없는, 얼마든지 미칠 수 있는데도 미치지 않고 생활하는 이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있다. 수사학적으로 얼마든지 미쳐나갈 수 있는 이가 애써 담담한 문장을 쓸 때의 포스는, 욕망을 충분히 아는 이의 절제가 빚어내는 치명적인 분위기와 닮았다. (205)


사실 위 인용문에서 말한 포스를 갖고 싶었다. 개인 사정으로 읽고 쓰는 행위를 몇 년이나 중단했기에 이제는 꿈이 더 소박해졌지만, 여전히 말과 글의 세계에서 자유로울 만큼 실력을 갖추고도 그 실력을 적절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부럽다.


이렇게 이 책과 저자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먼저는 이 책에 삽입된 그림들에 대해서 이다. 도대체 그림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림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의 글의 내용과 그림에서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저자가 해설을 해주거나 그림을 넣은 의도라도 언급해 주었다면 좀 나았을지 모르겠다. 그림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이 그림이 삽입된 뜻을 알 것이고, 그러니 너도 미술 공부가 필요하다는 의도일까? 그냥 좋은 그림이니 관심을 가져보고 너 나름대로 느껴보라는 의도일까? 아니면 아무런 의도가 없이, 저자가 돌+아이임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어떤 의도가 있든, 의도가 아예 없는 것이든 내 결론은 똑같다. 나에게는 이건 지면낭비다. (그가 그림에 조예가 있고, 다른 저서들에도 그림을 다룬다는 것은 안다. 다른 사람에게는 지면낭비가 아닐 수도 있다.)

또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윤리학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을 비하하면서,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까지 함께 비하하는 것은 옳은가?” 저자는 자신이 탈모를 겪고 있고, 대머리로 향하는 경계인(30)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생들과 “대머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학생들과 함께 토론을 하기도 한다. 자신을 희화화하는 것은 자유이며, 그것을 주제로 토론을 하는 것도 자유이다. 궁금한 점은 이 글을 읽은 전국 200만의 탈모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점이다. 그들도 탈모를 희화화하기를 원할까? 나는 할아버지에게 탈모가 없으시니 답변할 권리가 없는 것 같아서 비겁하게 침묵하겠다. ㅋ

마지막으로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천문학적인 돈이 생긴다면 모두를 데리고 이탈리아에 가겠다고 말한다. 공짜로 여행을 시켜주겠다는 마음은 감사하다. 하지만 나로서는 꽉 짜인 여행 계획과 괴짜스러운 그의 행동들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그 제안을 고사하겠다. 내가 봤을 때 이 저자는 무척 좋은 사람 같지만, 돌+아이가 분명하다. 가급적이면 거리두기를 하며 좋아해야 할 것 같다. 히히.


이 책의 마지막은 단테의 신곡의 첫 문장으로 장식된다.


인생을 절반쯤 살았을 무렵,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거칠고, 가혹하고, 준엄한 숲이 어떠했는지는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롭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죽음도 그보다는 덜 쓸 것이다…


저자가 이 구절을 언급한 이유는 “죽음 보다도 더 쓴 준엄한 숲과 같은 인생의 어두움에 서있는 인생”만을 언급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신곡의 시작 부분이기 때문에. 단테의 신곡은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결국 어두운 인생을 헤쳐나가서 빛이 있는 곳까지 도달해 가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공부란 무엇일까? 그 빛을 향해 걷는 그 걸음이 아닐까?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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