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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탐험가 Oct 14. 2023

이 책을 여러분께 강요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feat. 독서모임)

읽은 책 : 죄와 벌 1, 2권

저자 : 도스토예프스키

출판사 : 민음사 (2012)

작성 일시 : 2023년 10월 13일 (금) 저녁 10시 50분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책을 덮었다. 한동안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표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틀어놓은 유튜브 음악도 어느새 멈추어 있었다. 맥북 화면에는 멋진 풍경을 버드뷰로 촬영한 동영상이 화면보호기로 틀어져 있었다. “우리의 지금 얘기는 끝났다.” (2권 499) 도 선생의 마무리는 그랬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느낌이랄까? 그게 지난 몇 주동안 죄와 벌에 푹 빠졌다가 끝을 맞이한 나의 마음이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휴대폰에서 위잉하는 진동 소리가 났다. 이마트에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팔아먹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광고 톡을 보냈던 것이다. 그 의지를 손가락 하나로 제압한 후에 나는 글을 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도선생 문체를 흉내 내보려 했는데 쉽지 않다.)


[죄와 벌]을 완독 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 째는 8월 말이었다. 내가 참여하는 어떤 독서모임의 지정도서여서 속도를 내서 완독 했다. 그때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이후 로쟈)에게 주목했다. 내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로쟈의 심리에 온통 관심이 갔다. 1권에서는 마음으로 로쟈의 뒤를 따라다니며 과몰입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페테르부르크의 날씨와 비좁은 로쟈의 방에서 속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왠지 로쟈의 마음을 알 것 같았고, 그가 내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평범인-비범인” 사상(1권 467)이 등장하면서부터 나는 혼란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드러낼 수 없으면서도, 속으로는 그 사상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사람을 너무나도 혐오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유독 수준 떨어지는 일들이 많았다. 변기에 총각김치와 여성용품과 고양이 모래를 버려서 전체 배관이 다 막히질 않나, 재활용 쓰레기장 고철 담는 곳에 전자제품들을 버려놓지를 않나, 엘리베이터 옆 계단실에 소변을 봐놓지를 않나, 엘리베이터 문에 자꾸 뭔가를 끼워 넣어서 계속 고장이 나지를 않나, 아이들이 다니는 길목에서 떡하니 흡연을 하고 있질 않나. 동대표들의 이기심과 같잖은 정치공작들, 배 나온 런닝 아저씨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꽥꽥 소리 지르며 싸우는 모습들 같은 건 말을 하면 길어지니 꺼내기도 싫다. 이런 사람들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겠지만 문제는 이들이 나와 공간을 공유한다는데 있었다. 나는 이들을 경멸했고 혐오했다. 이들이 없다면 더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로쟈가 사람들을 '이'(1권 496)라고 말하는 오만함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나는 로쟈처럼 실제로 도끼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곤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인간 혐오가 결국 자기혐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인가 바뀔 수 있다면 그건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독서모임에 나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 책을 더 깊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쟈의 변화를 통해 나 또한 함께 변화될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내 속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이 독서모임에서 죄와 벌은 한 타임으로 끝났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그러다 마침 내가 리더를 맡게 된 다른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더 보기로 결정했다.


2독을 시작하게 되었다. 독서모임도 시작했다. 책이 총 6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6주간 만나기로 했다. 책모임을 진행하기 위해 자료를 만들었다. 줄거리와 각 장별 요약을 준비했고, 가벼운 질문들 몇 개와 등장인물•사건에 대한 논제 몇 개도 준비했다. 세세하게 읽으려고 하다 보니 책을 붙잡는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부 하나를 읽는데 약 이틀 정도가 걸렸다. 지겨워서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적이 많았다. 모임 중간에 추석연휴가 껴있어서 한주 정도의 쉬는 시간이 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스트레스에 모임을 중도포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 번째 읽으며 내가 처음에 가지고 있던 관점은 이런 거였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 로쟈는 꿈을 꾼다. 그때 마부에게 죽임을 당한 암말을 끌어안고 펑펑 우는 어린 로쟈(111)가 내 마음 깊이 울림을 주었다. 또 마르멜라도프라는 술주정뱅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술집에서 로쟈에게 신세한탄을 한다. 가정의 상황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데도 무책임하게 전재산을 가지고 도망쳐 나와 술 독에 빠진 그의 모습. 딸을 몸 파는 상황으로 내몰면서도 그녀에게 술값을 달라고 하는 파렴치한 모습. 로쟈는 “누가 나 같은 놈을 불쌍히 여기겠습니까?”(46) 말하는 그를 집에 데려다준다. 로쟈는 그의 가정 상황을 파악한 뒤 자기도 상황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돈을 탈탈 털어서 그곳에 두고 나온다. (54) 비록 그 직후에 로쟈가 자기가 무슨 일을 한 건지 어이없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로쟈의 선한 마음에만 주목하고 싶었다. 그런 대책 없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등장인물들을 바라보고 싶었던 거다. 독서모임 첫 주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이 책의 등장인물을 대책 없이 따듯한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해요. 그러면 저의 인간혐오도 좀 고쳐지지 않을까요? 실생활에서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4부를 읽을 때쯤 그 관점이 한계가 있다고 느껴졌다. 로쟈를 자세히 뜯어보면 볼 수록 하는 말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루쥔이라는 인물이 너무 밉상이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루쥔 패러 가자며 파티원을 모집하자고 장난스레 사람들에게 말했을까. 루쥔은 로쟈의 여동생 두냐를 돈으로 사려는 인물이었고, 그의 오만한 태도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었다. “내 여동생을 함부로 대하는 약혼자 엑스엑스”를 마냥 따듯하게 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어떤 윤리적 기준을 찾거나, 무엇이 선과 악이고, 무엇이 죄와 벌인 지를 따지는 것은 두 번째 문제가 된다. 만약 누군가 내 여동생을 건드리면 우선 그는 무조건 인간쓰레기이며 처맞아야 하는 것이다. 솔직히 그게 좀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책 없이 선한 시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자는 시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나의 도덕적 판단 기준을 완화해서 그 기준에 더 많은 사람이 부합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로 나를 좀 더 포용적인 사람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이란 그런 단순한 기준으로 판단되고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결국 나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려 한 것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을 충족하는 불가능한 존재로 보려고 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을, 사람들을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불편했기에 그런 관점을 가지려고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어떤 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분석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도 선생은 어떤 사람에게 선과 악이 모순적으로 존재할 때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겨 모순을 해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재판장면에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드넓은 천성을, 카라마조프적인 천성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결론인바 - 우리는 가능할 수 있는 모든 대립쌍들을 뒤섞을 수 있고 또 한꺼번에 두 개의 심연을, 우리들 위의 심연, 즉 드높은 이상들의 심연과 우리 아래의 심연, 즉 가장 저열하고 악취 나는 타락의 심연을 관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두 개의 심연, 여러분, 두 개의 심연을 한순간에 동시에 관조할 것 -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우리의 생존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3권 423)


두 개의 심연을 동시에 관조하는 것. 선과 악이 있다면 그것을 억지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복잡한 인간의 복잡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고통스러운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 분열된 자아의 분열된 상태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2독째 죄와 벌을 읽으며 내 안에서 크게 바뀌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모순적이고 선악이 뒤섞여 난장판일지라도, 그런 그들은 "사랑"한다. 

돈을 주어 소냐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해 준 로쟈. 그런 로쟈가 찾아가게 만드는 소냐. 소냐에게 성경에서 나사로의 부활 장면을 읽게 해서 마음이 해방되도록 도운 로쟈. 고해성사를 하는 로쟈에게 십자가를 내미는 소냐. 돈을 훔쳤다는 음모로부터 소냐를 변호해 준 로쟈. 그런 로쟈를 사랑하는 소냐. 소냐의 말에 따라 땅바닥에 입을 맞추고 자수를 하는 로쟈. 그런 로쟈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따라가는 소냐. 그 소냐를 밀어내고 나쁘게 대하지만 결국 그녀의 무릎을 안고 우는 로쟈. 그리고 그들에게 마침내 사랑이 임한 것이었다.

그러자 로쟈의 모든 고뇌는 끝나버렸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2권 498) 그 모든 시간, 정신이 망가져가다 결국은 미쳐버리고, 죽음에 이르고 마는 그 모든 고통이 마침내 끝났다. 고통이 끝끝내 가리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것 너머의 부활이었다는 것.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게 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여전히 나에게는 인간혐오가 남아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을 억지로 건들지 않는 거다. 우선은 관조해야 하고, 그런 나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만 이번엔 조심스레 사랑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사랑하려 해 보는 것. 물 컵에 흙탕물이 있을 때 깨끗한 물을 끊임없이 부으면 흙탕물이 다 흘러 나가듯이. 내 안에도 그런 사랑을 계속 붓다 보면,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어느 지점에서 그 모든 혐오는 사라져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로쟈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초반에 로쟈의 꿈에서 한번, 나중에 엄마의 작별인사에서 약간 등장한다. 이게 아쉬운 이유는 아버지가 로쟈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로쟈는 여동생인 두냐와는 성격이 비슷한데 엄마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즉 엄마보다는 아빠의 성격이 자녀들에게 더 나타난다는 말이 아닐까? 아버지의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언급이 있었다면, 로쟈가 왜 법대를 진학했는지, 왜 "평범인-비범인" 사상을 전개하게 되었는지 등 여러 가지 심리적인 이유를 자세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평생 한 권도 읽지 않고 살다 죽는다고 한들 인생의 의미가 더하거나 덜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전에는 인생이 막연히 불행했는데, 읽은 후에는 더 심오하고 구체적으로 불행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두에게 도스토예프스키를 추천하겠다. 강력하게 추천하겠고, 침을 튀기며 추천해서 그의 얼굴피부에 물광이 나도록 추천하겠다.


죄와 벌은 나의 인생책이 되었다.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읽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책으로 또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 또 하면서 또 읽고 싶다. 그러기에 세상 모든 사람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죄와 벌을 읽기 위해서 꼭 시간을 내라고. 강요 같은 추천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마음탐험가'입니다.
동탄에서 고전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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