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어우러진 상태의 나다운 곳‘으로
침을 삼키면 목이 따끔따끔한 기분, 셈해보니 이거 3년 만이었다. 시험관 시술, 유산, 임신(초기에는 유산 가능성, 중기 이후에는 조산 가능성), 출산, 이제 막 시작된 코로나 시국에서 신생아 키우기로 이어지는 나날 속에 외출 자체를 못하기도 했고 건강관리에 늘 만전을 기하다 보니, 3년간 감기 걸릴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11월 몹시 춥던 어느 날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운전을 하는데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한 치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 나는 창문 세 개를 다 열어버렸다. 김이 서린 게 아니라 안개가 낀 것이었는데(안개였다고 이 사람아..) 왜 때문에 창문을 열었을까 나는. 와 너무 추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을 다 닫았는데 그 잠시 사이에 감기에 덜컥 걸린 것. 잠시라고는해도 11월 아침 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오후부터 목이 따끔거리고, 콧물이 나오고 잔기침이 시작됐다. 다행히 열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코로나 검사를 했고 역시 음성.
문제는 아이에게 감기가 옮았고, 아이는 열이 났다. 결국 아이와 나는 동시에 아프게 돼버렸는데, 이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 다 외출을 못 하고 집에 있으니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고, 내 몸도 아픈데 아이까지 돌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게 2주쯤 겨우 지나고 나니 아이와 나 모두 다시 건강해졌다. 너무 갑갑했어서 1박으로 바다가 있는 곳에 다녀오니 좀 살 것 같았다. 계획에 없던 지출이라 망설여졌지만 다녀오고 나니 너무 잘했다 싶다.
그러다 오늘 오후, 내 인생이 갑자기 어딘가로부터 굉장히 멀리 왔다는 생각에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이건 뭐 그리움이나 후회라든가 감상에 젖는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갑자기 어마어마한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한 것처럼 멀미가 나는 기분.
어디서 촉발됐는지 불현듯 떠오는 이십 대 초중반의 내 모습과 지금 아이와 함께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모습의 격차는.. 정말이지 너무나 큰 것이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뭐라고 해야 할까.. 같은 사람 같지가 않고 아예 다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있다고 믿지도 않는 전생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25년 지기 친구에게 이런 기분에 대해 메시지를 보냈더니, "멀리 왔지.. 그게 다시 스프링처럼 튕겨서 제자리 비슷한 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아이와 어우러진 상태의 나다운 곳으로."라고 답이 왔다.
잠시 생각했다. 내가 그간 써온 글들의 대부분은 '나다움'을 잃거나, 잊은 것에 대한 것들이었다. 돌아갈 제자리 비슷한 곳이 내겐 없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나답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어떤 모습으로든 계속 존재해왔고, '나'는 '아이'와의 화학반응을 통해 그 성질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어우러지면 이르게 될 어떤 곳은, 그제야 '나다운 것에 보다 가까운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가져보는 '나다울 어떤 것'. 그건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비록 지금 이 시간은 신나지만은 않고, 어떤 날은 하루가 너무 길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좌절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 마흔이라는 게 한 달도 안 남아서 그런가, 괜히 요즘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앞자리가 바뀔 때는 그래도 좀 싱숭생숭하잖아. 그래도 오늘 하루도 그럭저럭 잘 보냈다. 그거면 됐지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