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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24. 2022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외부로부터 오는 개입이되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

나름 불문학을 석사까지 전공했지만 프루스트는 (아예) 잘 모른다고 해야 맞겠다. 여러 수업을 들었지만 프루스트와는 연이 닿지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 따로 독서한 것도 아니었으니.


  4월에 날이 좋아 여기저기 소풍을 다니다 보니 생각보다 지출이 많았다. 4월에 구입한 책들은 모두 완독 했는데, 장바구니에 담긴 새 책들을 구입하자니 이미 생활비는 빠듯한 상황. 열흘은 더 기다려야 5월에 해당하는 예산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왕왕 발생했었는데 그렇다 보니 집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1회 이상은 읽었다.


끝내 손이 가지 않는 몇 권의 책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프루스트의 이 책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밤 산책'과 함께 2015년 경에 구입했던 거 같은데, 이 두 책들 모두 이상하게 읽게 되지를 않았다. 분명 읽고 싶어서 샀을 텐데 왜 그랬을까, 매번 아 지금은 아니야, 오늘은 내키지 않는데, 하는 식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 유예진 옮김, 2014, 은행나무 / 아이의 손길 덕분에.. 집에 있는 책들 중 표지가 성한 게 별로 없다ㅋ

어쨌거나 집에 있는 책들로 열흘을 버텨야만 하는데 읽었던 책들은 더 이상 땡기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어쩌다 눈에 다시 들어온 책, <마르셀 프루스트, 독서에 관하여>(*이 책은 프루스트의 산문 중에서 그의 예술론이 잘 나타나 있는 것들을 옮긴이가 골라 번역한 책이다.) 책장 앞에 선 채로 슬쩍 표지를 넘겨 첫 페이지를 읽다가 본격적으로 앉아서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샀을 때 앞에 몇 페이지는 읽었던 모양인지 밑줄이 쳐져 있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을 이루는 날들 중에는, 우리가 제대로 보내지 못했다고 여겼거나 좋아하는 책과 같이 보낸 날들만이 어쩌면 진정으로 충만하게 보낸 날들이다. 숭고한 기쁨을 저지하는 속된 방해물로 생각되어 멀리하려 했던 모든 것들, 가령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을 읽을 때 친구가 와서 같이 하자는 놀이, 페이지에서 눈길을 돌리게 하거나 자리를 바꾸게 만드는 귀찮은 꿀벌이나 한 줄기 햇빛, (...) <독서에 관하여, p.9>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의 감흥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정도로 찌르르-했다. 유년시절을 나는 책으로 기억한다. 내가 좋아했던 하이디, 동방박사 이야기 같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몇 가지 책을 몇 번이고 읽었던 것 같다. 프루스트의 이 아름다운 문장들은 그 시절 감수성의 모든 것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예전에 비해 꽤나 많이 말랑말랑해진 마음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이 책이 내 마음 한 켠에 안착했다.


프루스트는 이 글(책에 첫 번째로 실린 글)에서 독서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 독서가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의 논리는 손이 닿지 않던 간지러운 곳을 아주 우아한 손길로 와락와락 긁어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왜 계속 읽는지, 특히 최근 삼사 년 사이 왜 그리도 더 몰입하여 읽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는 이 글에서 '책을 향한 일종의 우상숭배와 같은 독서'와 '스스로의 정신으로 독창적인 활동을 하는 독서'를 구분한다. 전자의 독서의 경우 읽기 위해서, 읽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읽는 독서다. 책은 흡수할 수 있는 삶의 원리가 되지 못하고 이질적 분자이자 죽음의 원리가 되는데, 독창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정신은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정수를 책에서 끄집어낼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독서에 대한 대한 그의 문장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임신, 퇴사, 출산, 육아를 겪어오며 '나다움', '고유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과 더욱 가열찬 독서를 했던 시기가 겹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 이러한 외부의 개입이 없으면, 그들은 자신을 영원히 망각한 채 표면에서 살게 되며, 그들을 단순한 즐거움의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리며 주변에서 그들을 흔들어 놓는 것들과 같은 크기로 축소시키는 일종의 수동적인 상태에 빠진다. 어린 시절부터 거리의 도둑들과 같이 살아온 어떤 신사가 너무 오랫동안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서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갑자기 되찾고 창조할 수 있게 되는 정신의 세계에 반강제적으로나마 그들을 끌어들이도록 외부에서 개입하지 않으면 그 환자들은 자신의 고귀한 영혼에 관한 모든 감정과 기억을 잊게 될 것이다. <독서에 관하여, pp.36-37>
즉 그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개입이되 자신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자신과는 다른 영혼이 개입하되 혼자 있을 때 그것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독서의 정의라고 앞서 살펴보았고, 이것은 오로지 독서에만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혼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독서이며, 수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증명 완료'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다시 한번, 독서는 우리의 개인적인 활동을 대체할 수 없고 단지 시작을 독려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독서에 관하여, p.37>
그(쇼펜하우어)는 그러한 암시들 속에서 자기 고유의 생각을 알아보는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암시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독서에 관하여, pp.44-45>


 그에 따르면 책 애호가에 가까운 박학다식함은 지적 능력보다 오히려 감성에 해악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지만, 독서가 이롭게 작용하는 경우에는 정신의 독창적 활동을 통해 지식이 현실에 즉각적으로 흡수되고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정수를 책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시작임에 불과한 것을 마치 규범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독서에 지나치게 큰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독서는 정신적인 삶의 도입부에 있다. 독서는 그러한 삶에 안내할 수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아름다운 책들이 갖는 위대하고 뛰어난 특성들 중 하나로(이는 독서가 우리네 영적인 삶에서 갖는 기본적이면서도 동시에 제한된 역할을 상기시키다) 작가에게는 '결론'이고 독자에게는 '시작'인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지혜가 끝날 때 우리의 지혜가 시작됨을 느끼고, 작가가 우리에게 해답을 주기를 원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에게 욕구를 불어넣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욕구를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예술에 있어 최후의 노력을 하여 도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감상하게 할 때에만 가능하다.(독서에 관하여, pp.32-33)

번역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와 이 책 번역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라는 커다란 고마움과 한편으로는 번역된 문장은 원래부터 한국어로 쓰인 문장보다는 아무래도 이해가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에, 혹시 내가 잘못 이해했으면 어쩌지라는 걱정도 한편에 남는다. 또 애초에 그 어떤 번역서든 오역의 가능성은 늘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프루스트를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다면 독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통 이런 부분이 계기가 되어 더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게 나의 패턴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 글은 원문으로 꼭 다시 읽어보고 싶다.


 얼마 전에 종종 봤던 <공부왕찐천재>의 홍진경이 독서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얘기를 한 걸 인터넷에서 봤다. 난 왜 책을 읽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이만한 통찰력으로, 무엇보다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설명한 걸 들어본 건 처음이다.


"내가 책을 왜 봐야 한다고 생각하냐면, 삶이 매 순간 선택이다? 글을 많이 읽으면 선택을 잘하게 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해요. 그건 분명해요. 그렇다면 영어 단어 몇 개 더 아는 게 뭐가 중요해요? 사유를 깊게 하고 좋은 선택을 하는 거, 그게 훨씬 더 필요하더라고 살아보니까"


프루스트의 말처럼 독서는 지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우리는 책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정신적인 삶', 그리고 개인적인 활동을 추동하는 '욕구'를 발견한다. 책이라는 아주 내밀한 외부의 개입을 통해 내 고유의 생각을 알아보고 나의 영혼에 대한 잃어버린 감정과 기억들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분명 보다 나은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재미있는 책'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 그 자체, 프루스트가 표현한 것처럼 유년 시절 '식사를 마치자마자 멈추었던 장을 마저 끝낼 생각에 방으로 서둘러 올라갈 생각으로만 가득했던' 그 찌릿찌릿 기분 좋은 기억이 여전히 내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 그게 내가 책을 오래도록 가까운 친구로 두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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