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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02. 2022

<요조>, <이슬아>, <임경선>을 읽다가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하는 것'에 대해

  아기는 하루에도 몇 번씩 책장에 꽂혀 있는 어른 책들을 재미 삼아 꺼내온다. 한 장씩 들춰보다 내려놓고 다른 책을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책에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집 어른 책들의 속표지(본문은 사수중!)에는 이런저런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자가격리 중이었던 어느 날이었는데, 이 날 아기가 집어 온 책은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문학동네, 2019)였다. 19년 말이었는지 20년 초였는지 대략 2년 전쯤 읽었는데 임경선 작가와 가수 요조의 교환일기 형식으로 쓰인 책이다. 마침 펼쳐진 페이지에 아이가 형광펜으로 밑줄 쳐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그 부분을 읽게 됐다.


 "단지 '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끝'이 썩 아름답지 않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실패나 불행의 경험으로 치부하는 것은 상대한테도 나한테도 너무 가혹한 처사야. 그 시간들 모두가 우리 인생의 대체하지 못할 시간들이었으니까"(p.95)


그때는 왜 밑줄을 쳤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지금은 확실히 이 문장의 의미를 안다. 실패나 불행의 경험은 그때도 지금도 동일하게 존재했는데, 그 일들에 대한 나의 해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 문장에 밑줄을 쳤을 시점에는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생각할 때가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밑줄을 쳤을지 모른다. 지금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른 밑줄 친 부분들은 지금 보면 어떨까? 혹은 밑줄 치지 않은 부분은 지금 보면 어떻게 읽힐까? 이게 궁금해져서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지난 시간들이 느껴졌다. 밑줄 친 부분들은 농도와 깊이를 달리하여 더 찐-하게 이해되었고, 밑줄 치지 않은 부분들 중에서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고. 그중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하는 것 - 경선"을 읽다가 밑줄 쳐 둔 부분에 다른 색으로 밑줄을 치게 됐다.


"(..) 아무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안 할 것들을 사소하게라도 조금씩 테두리를 정리해가다 보면, 의외로 좋은 것들이 결과적으로 내 곁에 남게 되고, 나만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저절로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 같아.(p.30)

 (...) 아, 그러고 보니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하는 것'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거야'라는 삶의 태도 그 자체도 나이와 연관이 있네. 본능적으로 '내게 시간이 아주 많이 남지는 않았다'라는 자각을 하면서 인간관계나 생활방식을 예전보다 더 심플하게 추리게 되는 거지. 나한테 정말 필요한 것과 굳이 없어도 살 것들이 확실해지는 것, 다시 말해 위화감에 민감해지는 거야. 그런 깨우침들이 쌓이면서 '내가 살아갈 세계'를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걸 테지"(pp.32-33)


이 문장들을 보면서 작년에 재미있게 읽은 이슬아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헤엄, 2019)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아무튼, 비건>의 김한민 작가와 이슬아 작가의 대화였는데 공감이 가서 따로 기록해 뒀었다.


이 : 그런데 선택지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끼며, 저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김 : 네, 저도요.


이 : 왜냐하면 모든 게 너무 과잉되어 있으니까요.


김 : 맞아요.


이 : 식사 시간만 되면 딱 명료해지는 게 있어요. 주어진 게 별로 없는 상태에서 하는 선택.


김 : 이 시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무엇을 안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너무나 많은 가능성들이 있으니까요.


이 : 정말 그래요.


 '비건'을 주제로 대화하면서 나온 내용인데, 선택지와 가능성이 너무 많아진 시대에 '나는 적어도 이것은 하지 않겠어'라고 결정하는 '능동적 절제'에 대한 이야기들. 그 다음에 이어진 대화가 인상깊었는데 이는 '언뜻 거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연결되고 싶어서 하는 행동(김)'이라는 것과 '무엇에 접속하느냐 보다 무엇을 차단하는가가 더 중요한 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하는 능동적 절제'가 '나'를 더 깨닫는 것을 통해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내가 살아갈 세계를 결정'하는 일이라면, 이는 결국 그렇게 추려진 후 소중하게 남은 것들과 주어진 시간 동안 더 진하게 접속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다시 다 읽고 요조의 산문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마음산책, 2021)을 주문했다. 순하고 맑은 데 맹탕이 아니라 알싸한 맛이 있는 그런, 특히 자신에게 약간은 매정한 듯한(자기 비하가 아니라 냉철한 자기 객관화에 가까운) 태도가 조금 더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여러 생각에 공감이 가기도 했고. 새로 도착한 책을 순식간에 읽어 내려가다 이번에는 다음의 대목에 밑줄을 쳤다.


"나는 내가 묽은 사람인 동시에 아주 미숙한 인격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알기로 인격이 미숙한 사람이 자기 신념에 너무 몰입하여 엄격해지면 자신의 무결함에 도취되기 쉽다. (...) 동시에 내 신념을 자진해서 일부 더럽힘으로써(!) 내가 어쭙잖은 무결함의 도취로 가는 길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미연에 막는다.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맞춰서 얼마든지 나보다 더 묽게, 혹은 더 진하게 커스터마이징 하며 각자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채식주의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 진정한 채식주의자가 아니라고 누군가 조롱하거나 비난하더라도 조금도 신경 쓰지 말기를 바란다. 이 일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당신 자신에게만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의 주인공은 당신뿐이다"(pp.187-188)

 

  위의 문장에서 '채식주의' '내가 하지 않기로  무언가' 대입하여 읽어봤다. 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잘 사랑하는 것을 병행하는 방법은, 스스로에게 느슨한 여지를 주되 나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기억하는 것일 테다. 자의식 과잉이나 꽉 막힌 자기 고집이 되지 않도록 나만의 균형을 잡으려고 꾸준히 노력해야  것이고 이는 물론 꽤나 대단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진하고 깊은 연결을 위한 묽은 노력'을 이미 연습하고 훈련하여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 그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존경스러운 요즘이다. 마흔, 나도 보이지 않은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보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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