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단 호크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나는 에단 호크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외국 배우는 only 에단 호크뿐이다.
한국 배우 중에서 누가 좋냐고 하면 드라마 ‘공항 가는 길’과 ‘두 번째 스무 살’의 이상윤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그렇지만 지오 선배의 현빈은 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최고고(청순함과 지적임의 콜라보랄까), 그런데 공유도 멋있잖아!라는 생각에 한 명만 꼽을 수가 없다없다없다.
그러나 모두 통틀어 딱 한 명만 꼽자면 역시 에단 호크. 그 철학적인 얼굴과 목소리는 과연 독보적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어쩌면 찐팬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나는 일종의 덕후 기질은 전혀 없는 사람이라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모든 작품에서의 에단 호크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비포 시리즈에서 보이는 에단 호크를 좋아하는 것이라서.
아무튼 에단 호크를 얘기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레타 거윅을 얘기하려는 것인데, 에단 호크가 나온 영화를 찾다가 “매기스 플랜(Maggie’s Plan,2015)"을 보게 됐고, 이 영화에서 그레타 거윅의 매력을 알게 돼서 이 배우가 나온 영화를 봐야겠다, 라는 생각에 검색을 시작했다.
맨 처음으로 “미스트리스 아메리카(Mistress America, 2015)”를 택했는데 아주 좋았고, 이어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2016)”를 봤는데 또 좋았고 그녀가 각본을 쓴 “레이디버드(Lady Bird, 2018)”까지 보게 됐는데 역시 좋았다. 최근 개봉한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이 보고 싶지만 아기가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신생아라 당분간 집중해서 볼 시간은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좋아하는 배우라고 하면 ‘에단 호크’만이 떠올랐었는데, 이제 ‘그레타 거윅’도 말할 수 있겠다. 그녀는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하니, 좋아하는 작가이자 감독이라고 해도 되겠다.
난 보통 작가나 배우가 좋아지면 프로필을 먼저 찾아보는데, 그레타 거윅의 경우 왜 그랬는지 프로필은 흘려버리고 영화 먼저 찾아보게 됐었다. “레이디버드”까지 보고 나서야 그녀의 나이와 전공이 궁금해졌고, 83년생에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는 걸 알고 나니 동갑내기 그녀가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레이디버드”가 왜 그렇게 공감이 갔는지 이해가 됐고,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는 걸 알고 나니 내가 왜 “미스트리스 아메리카”(각본 그레타 거윅)를 제일 먼저 보게 됐는지 떠올랐다.
주인공 트레이시가 작가를 꿈꾸는 영문과 전공 1학년생이라 학교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인데, 근사한 배경에서 공부하거나 책 읽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들을 난 사랑 한다.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Mona Lisa smile, 2003)”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위에 언급한 네 작품은 2019년 1월~12월 사이에 띄엄띄엄 봤는데(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0년 5월), 매기스 플랜은 작년 1월에 봤으니 본 지 1년도 더 지났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와 우리의 20세기는 작년 봄~여름 사이에 걸쳐 봤던 것 같고, 레이디버드는 11월쯤 봤었다. 우리의 20세기까지는 보고 간단히라도 적어둔 메모가 있는데 레이디버드는 따로 적어둔 것이 없어서 기억에 의존하여 끄적거려 봐야 될 것 같다. 매기스 플랜, 미스트리스 아메리카는 지금 보면 아주 다르게 와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그때 메모에 의존하여 정리해두고 나중에 다시 보게 되면 추가 정리해보는 것으로.
(*약간의 스포 주의!)
ㅇ 감독 : 레베카 밀러
ㅇ <에단 호크>, <뉴욕 배경>, <예쁜 포스터>. 이 세 가지가 이 영화를 보려고 결제한 이유다. ‘에단 호크’가 나오는 ‘뉴욕’ 배경의 영화라고 하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예쁜 색감의 포스터와 타이포도 눈길을 끌었고. <유브 갓 메일>이나 <왓 위민 원트> 같이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런 영화들은 대게 영상이나 음악이 좋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뉴욕의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첫 장면의 따스한 색감부터 시작해 영화 전반의 인테리어와 감각적인 색감에 눈을 한시도 뗄 수 없다. 내용은 사실 로맨틱 코미디 계열로 볼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걸 기대한다면 실망하겠지만, 나처럼 (이런 분위기의) 영상과 음악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충분히 충족되는 요소.
매기(그레타 거윅)는 자신의 인생에 결혼은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내 인생을 운명에 맡기기는 싫어서’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을 실행하던 중 ‘우연히’ 유부남 존(에단 호크)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다시 이혼을 ‘계획’한다. 영화의 엔딩이 무척 인상적인데, 영화의 메시지를 잘 전달해 주는 것 같다.
인생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때,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계획대로 되어 있기도 하다는. 매기의 계획은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 싶은 마음과 타인을 행복하게 해 주고픈 마음에서 비롯되지만 이를 실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수와 변수들은 계획을 망치게도 한다.
이 주인공이 매력적인 이유는 자신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의견을 표현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사실 당연하지만은 않다.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타인의 평가나 의견에 의존해서 사는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많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비판들은 강도 높지만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모든 비판을 무시하거나 그 비판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무지해서가 아니다. 화를 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충분히 설명하며,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우울에 빠지거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건강한 여성이 주인공인 점이 신선했고, 그녀가 실수와 이를 극복하는 방식들이 묘하게 위로가 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레타 거윅이 연기한 매기의 힘 있는 목소리, 또렷한 눈, 해맑은 미소가 주인공 캐릭터의 건강한 매력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연기했기에 이토록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완성되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실수하며 살아간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뿐더러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 그 순간에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난장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만 때로는 생각지 못한 전혀 엉뚱한 데서 인생이 풀려나가기도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문제들은 심각하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심각해 지지는 말 것, 알고 보면 난장판 인생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겠나, 라는 점에서 위로가 되어주는 영화.
ㅇ 감독 : 노아바움벡
ㅇ 주연 : 그레타 거윅, 롤라 커크
ㅇ 각본 : 노아 바움백, 그레타 거윅
ㅇ 20대의 ‘트레이시(롤라 커크)’와 30대의 ‘브룩(그레타 거윅)’,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 일단 큰 틀에서는 20대와 30대 모두 불안정하고 불안하다는 점을 그리고 있지만 30대의 삽질은 20대의 삽질과는 데미지가 다르니까. 내게 보다 더 흥미로웠던 포인트는 트레이시가 표현한 ‘브룩’에 대한 인물 설명, 즉 ‘로맨스와 실패의 마지막 인물’이라는 평이다.
우리 세대는 큰 로맨스와 큰 실패보다는 작은 성공, 안정적인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다. 사실 헤아려 본 것이 아니니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세계 그리고 각본을 쓴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는 누적된 실패의 경험들을 이미 봐 온 사람들의 ‘몸 사림’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영화 속 트레이시는 뛰어들어 산다기보다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편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자신과 타인을 관찰하면서 좀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트레이시는 관찰자, 사이적 존재로서 존재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달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문학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에 계속 실패하지만 계속 문을 두드리고, 결국 들어갔다가 다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동아리를 만든다.
반면 브룩은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늘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에너지가 넘치며 잡기에 능한 인물로 좋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 무언가 진짜 멋있는 거, 정말 좋아 보이는 것을 내가 하고 싶지만, 그 위치에 가고 싶지만 정작 능력은 부족하여 한계에 부딪힌다.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빼버리면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실패하는 ‘브룩’.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그녀 같은 인물을 통해 여전히 삶에 뛰어들어 사는 인물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있는 것도 같다. 능력도 안 되면서 뭐가 좋은 건지는 알아서 허황된 꿈을 꾸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브룩에 대해 냉소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를 보다 보면 브룩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연민도 느껴지니까.
영화를 보는 나 역시 ‘현실과 이상의 차이’ 속에서 느끼는 괴로움이 있기 때문에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고. 그녀가 재혼을 포기하려는 아버지와 통화하면서 제발 “버텨보라고(hang in there)” 울면서 얘기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끝까지 버텨보는 것, 인생에는 그런 것이 필요한 때가 있으니까.
ㅇ 감독/각본 : 마이크 밀스
ㅇ 우리의 20세기를 보면서 뒤늦게 생각했다, 그레타 거윅이라는 배우가 여성이 중심이 되는 작품들을 하고 있다는 걸.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작품들에서는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고, 인물들의 캐릭터도 현실적이다. 환상이 덧씌워진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배울 점이 있는 여성 캐릭터들.
ㅇ 이 영화는 대사가 좋았나 보다. 대사 메모만 남아있다.
"행복을 따져보는 건 우울해지는 지름길이야."
"이겨낼 거야 그래야지 그럴 거야.
지금이야 정말 힘들지만 아무리 힘들어져도 금방 괜찮아져.
그래 봐야 또 힘들어지지만."
"내 생각엔 강한 게 최고의 자질 같아.
연약함이나 예민함도 아니고 솔직히 행복감보다도 나은 것 같아. 힘이 있다는 거잖아.
다른 감정들을 버텨낼 단단함이 있다는 거고."
강함, 단단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요즘이다.
강한 체력과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ㅇ 감독/각본 : 그레타 거윅
ㅇ 이 영화를 본지 반년 정도 된 것 같은데.. 따로 메모해 둔 게 없어 기억나는 생각들 중심으로 적어봐야겠다. 일단 보는 내내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감탄했다. 애증 관계를 너무나 잘 그렸다. 정말이지 모녀의 세계란.
내게 이 영화의 명대사는 (적어두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은데), 딸이 엄마에게 묻는 장면이었다. “날 사랑하는 거 말고, 좋아하냐고”라는 내용의 질문이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난 엄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엄마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 어쩌면 나도 엄마에게 그런 존재였을 수도.
십 대 소녀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연약한지 그렇지만 또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무척이나 공감 가는 순간들을 잘 포착해서 마음이 저릿하기도 했다.
어떤 상황일지 무슨 감정일지 알겠어서 보지 않고 넘기고 싶은 장면들도 있었고, 사춘기 소녀 시절의 미묘한 감정들을 저렇게 잘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심지어 이를 그토록 섬세하게 잘 구현해낸 그레타 거윅이 정말 대단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대단하다. 연기하는 캐릭터 자체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에너지, 거기에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해내는 그녀의 열정과 능력이 그 자체로 존경스럽다.
사실 어쩌면 이 글은 쓴 이유는 하나다. 이토록 사랑스럽게 지적인 그녀의 건강한 에너지가 부러웠다. 또랑한 맑음이랄까. 생기 가득한 눈동자와 미소가 매력적이다. 동갑내기 그녀가 너무 멋져 보여 그 언니를(멋지면 다 언니..) 약간은 닮고 싶은 마음을 담아 끄적여 봤다.
(2020년 5월 21일 작성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