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한잔 필요할 時_한 잔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어쩌면 아주 모르지만,
시를 필요로 하는 '때'는 있다.
꼭 위로나 위안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 어쩌면 그보다는 시인만의 통찰력을 빌리고 싶은 순간들이랄까. 생생한 관찰, 정제된 언어만이 주는 쾌감과 전율이 있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때론 보이는 것 너머를 보게 하는 어떤 힘들.
이번 겨울의 끝과 봄의 처음, 그 흐릿한 경계에서 나는 시가 필요했나 보다. 몸이 허할 때 땡기는 음식은 꼭 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마음이 허할 때 땡기는 것도 있는 것이다.
쌉싸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한 때가, 꿀을 넣은 따스한 차 한 잔이, 씁쓸하고 들큼한 술 한 잔이 지금, 여기, 딱, 너무나 간절한 때가 있듯이, 시가 (나를) 당기는 순간들. 그럴 때 우리는 기꺼이 취할 자세로, 기어코 취해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자세로 겨울의 끝과 봄의 길목에서 처음 골라든 시집은 <멍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이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쉽사리 주문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봄기운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주문했었다.
그중에서 오늘은 Spring and All(봄 그리고 모든 것)을 첫 잔의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멍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 정은귀 옮김 / 민음사)
책의 왼쪽 페이지에는 원문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번역이 실려있는 구성인데, 기회가 된다면 원문으로 읽어보시는 걸 꼭 추천한다. 1연에서 4연까지의 contagious, cold, waste, muddy, dried, standing and fallen, scattering, dead, leafless, lifeless, sluggish, dazed. 5연에서는 enter, naked, cold, familiar. 마지막 두 연에서는 now, tomorrow, defined, quickens, clarity, But, stark, entrance, profound, rooted, grip down, awaken 같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남았다.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그 노고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에게 빚지는 마음, 고마운 마음으로 읽을 뿐이다.
어느 정도 볼륨이 있는 시집이라 야금야금 아껴가며 볼 수 있어 마음은 오히려 두둑하다. 여기 오늘 기록에 다 남기진 못하지만 자꾸만 다시 읽어 보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시들이 여러 편 더 있다. 워낙 알려진 시인이니 나의 얇디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하고 싶진 않다. 그저 선택된 단어의 견고함이 내 마음을 관통했다는 것, 그게 중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