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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01. 2022

봄 그리고 모든 것(Spring and All)

시 한잔 필요할 時_한 잔

나는 시를 잘 모르지만, 어쩌면 아주 모르지만,

시를 필요로 하는 '때'는 있다.


꼭 위로나 위안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 어쩌면 그보다는 시인만의 통찰력을 빌리고 싶은 순간들이랄까. 생생한 관찰, 정제된 언어만이 주는 쾌감과 전율이 있다.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때론 보이는 것 너머를 보게 하는 어떤 힘들.


이번 겨울의 끝과 봄의 처음, 그 흐릿한 경계에서 나는 시가 필요했나 보다. 몸이 허할 때 땡기는 음식은 꼭 먹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마음이 허할 때 땡기는 것도 있는 것이다.


쌉싸름한 커피 한 잔이 간절한 때가, 꿀을 넣은 따스한 차 한 잔이, 씁쓸하고 들큼한 술 한 잔이 지금, 여기, 딱, 너무나 간절한 때가 있듯이, 시가 (나를) 당기는 순간들. 그럴 때 우리는 기꺼이 취할 자세로, 기어코 취해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자세로 겨울의 끝과 봄의 길목에서 처음 골라든 시집은 <멍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이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쉽사리 주문을 결정하지 못하다가, 어디선가 느껴지는 봄기운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주문했었다.


그중에서 오늘은 Spring and All(봄 그리고 모든 것)을 첫 잔의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멍들지 않은 꽃의 연약함이 공간을 관통한다>(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 정은귀 옮김 / 민음사)


책의 왼쪽 페이지에는 원문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번역이 실려있는 구성인데, 기회가 된다면 원문으로 읽어보시는   추천한다. 1연에서 4연까지의 contagious, cold, waste, muddy, dried, standing and fallen, scattering, dead, leafless, lifeless, sluggish, dazed. 5연에서는 enter, naked, cold, familiar. 마지막  연에서는 now, tomorrow, defined, quickens, clarity, But, stark, entrance, profound, rooted, grip down, awaken 같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남았다.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시'를 번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그 노고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에게 빚지는 마음, 고마운 마음으로 읽을 뿐이다.


어느 정도 볼륨이 있는 시집이라 야금야금 아껴가며 볼 수 있어 마음은 오히려 두둑하다. 여기 오늘 기록에 다 남기진 못하지만 자꾸만 다시 읽어 보게, 생각해보게 만드는 시들이 여러 편 더 있다. 워낙 알려진 시인이니 나의 얇디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하고 싶진 않다. 그저 선택된 단어의 견고함이 내 마음을 관통했다는 것, 그게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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