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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Nov 18. 2022

서른 일곱 가을을 보내며

인별그램에 올린 조각글 모음 35 


꿈에 이너조이가 나왔어요..
이너조이가 창문을 보고 있는데 밀물이 막 밀려왔어요. 

- 판교책방지기에게서 온 10월 4일의 카톡



1. 


기모 레깅스를 입고 집에 콕 박혀 있다. 12월 초까지 맨 다리에 짧은 치마를 입던 10년 전의 내 모습을 상상만 해도 손목, 발목이 다 시려워지는 것이. 나이듦을 자주 실감하는 요즈음. 기모 레깅스와 두터운 맨투맨을 입고 집안일을 하다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이 사랑스럽다.



2. 


지난 주부터 매일 밤낮으로 듣는 설교 말씀으로, 이전에 없던 깊은 회복과 맑은 마음을 얻었다. 이 마음은 다시 말하자면, 열 다섯 살에 특별한 고난을 선물 받아 스물 한 살에 하나님을 처음 만나 심쿵했던 그 첫사랑의 마음과 조금 닮아있다. 이 시간 내가 확실하고 선명하게 깨달은 건..


애쓴 경력을 버리고 주저앉은지 7년, 내가 '부디' 다시 일어서길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

내가 크리스천임을 은폐하려 애써왔다는 것, 그래서 늘 나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고 점점 피상적인 종교인, 습관적인 사역자가 되고 있었다는 것.

선한 마음을 감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표현하라는 것. 내게 고맙다고 하는 이들의 그 감사를 받고 기뻐하기를,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축복하고 사용하길 원하신다는 것.



3. 


"어머님, 아인이 키워 보셔서 아시잖아요. 아인이 머리 좋은 거 아시죠?"

"아인이 언어가 남다르네요."

"생각이 깊죠, 아인이는."

"아인이 덕분에 친구들이 한글에 관심을 많이 가져요."

"아인이가 친구들 보여주려고 가져오는 책 때문에 아이들이 배꼽잡고 재미있어 해요."

"할 줄 아는 게 많아서 활동 시간에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죠."

"표현이 섬세해서 놀랐네요."


아이는 잘 큰다. 늘 언니들과 놀고 있어서 어리숙하고 위축되어 있는 모습만 보여 아직 아기구나, 싶었는데 6세 가을 내가 여기저기서 듣는 아인이 이야기는 :)


내가 이렇게 멋진 아이를 키워도 되는 것일까 생각한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축복하려고 단단히 작정하시고 내게 보내신 사람, 아인.



4. 


트렌드 2023을 읽으며 와, 재미있는 세상이다! 하다가도 나, 적응할 수 있겠는가, 고민한다. 그리 새롭지 않은 이야기, 이미 현실로 다가온 이야기들이지만, 이것들이 트렌드가 된다고 하니 현기증이 느껴진다. 조용히 바다 앞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책 읽다 바다 보다 기도 하다 잠드는 일상을 살고 싶다.



5. 


어서 뿌리염색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벌써 2년 넘게 다니는 헤어샵인데 두피 마사지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계속 찾아간다. 동생 같은 디자이너 분인데 손힘이 좋아서 언니같이 포근한(?) 분.



6.


결혼기념일 새벽 4시 반 무렵 남편이 자다 일어나 "이태원에서 150명이 압사됐대.'' 했다. 잠결에 웬 꿈이 저래? 하고 다시 자려는데 발끝부터 싸늘함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꿈 이야기를 하거나, 농담하는 일이 좀체 없는 남편이 구체적인 장소와 숫자를 언급했다는 것에서.



7.


뉴스를 확인하고 다시 잠들 수 없었고 자고 있는 딸 아이를 꽉 껴안았다. 동시대인들의 집단적인 죽음은 개인들에게 슬픔을 넘어선 무력감을 준다. 결혼기념일 아침까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8.


사건 당일과 그 다음날 아침까지 이태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막내 동생의 증언, 그러니까 목격자 증언을 듣고서, 그제서야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꽃 같은 친구들이 정말 떠난 거구나.



9.


평소처럼 아침에 예배를 드렸고 점심을 먹었으며 오후에는 아이 놀이터에 데려갔다가 결혼기념일 저녁식사로 예약해 둔 식당에 차를 타고 갔다. 모든 일정과 동선 가운데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움이 계속 떠올랐고.



10.


준비된 식사 앞에서, 여의도의 야경을 바라보며, 앞으로 몇 날을 슬프고 먹먹하게 있어야 하는 걸까, 결혼기념일마다 떠오를 이 사건에 대하여, 그 깊은 애도의 마음에 대하여.



마음 깊이 애도합니다.


11.


우리집에서 가장 애정하는 풍경. 내 인생 찐책들만 꽂아놓은 책장과 째즈 레고의 뒷편으로 그라데이션 커튼이, 그 커튼 뒷편으로 나무 그림자가 져있는 베란다 창, 그 창을 열면 가을 나무가 보인다. 이 풍경을 보면서 일하고 싶어 거실 테이블을 베란다에 바짝 붙여 놓았다.



12.


어렵고 힘든 문제 앞에 내가 불면으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하신 우리 주님은 최근 아주 달콤한 잠으로 나를 계속 재우신다. 불가항력적인 졸음이 아니었다면 난 한 문제를 앞에 두고 매일 밤 씨름을 벌였을 것이다. 밥도 주시고 옷도 주시고 잠도 주시는 하나님 만세구나.



13.


아이는 여섯 살 끝무렵이 되더니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면 엄마를 덜 찾을 줄 알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걸 엄마와 함께 하고 싶어 난리다.


"엄마가 너무 좋아서.

엄마를 정말 정말 좋아해."


그랬구나.



14.


아이가 나중에 크면 아티스트가 되거나 셰프가 되겠다고 했는데 아빠가 셰프는 안 된다고 했단다. 나한테 와서 '왜 그것이 안되냐고' 물었는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도 없고 하여 '아티스트가 셰프보다 낫지 않겠니' 했다. 그래도 우리 너무 현실적으로 키우지는 말아요?!



15.


어제 2시간 걷기 운동을 하며 동네를 보니 온통 울긋불긋하더라. 이렇게 예쁜 계절에 이 곳을 떠난 사람들이 생각나서.



16.


어느새 살이 빠진지도 모르고, 입던 사이즈로 해외구매를 했다가 허리부터 허벅지, 종아리까지 너무나도 루즈하여 반품하려 했더니 '해외구매 반품' 비용은 반품배송비 + 해외물류비를 함께 부담해야 한다 해서 입지 않을 새 상품을 옷장에 가지런히 걸어두게 되었다.



17.


여기 저기서 어여쁜 가을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계절, 여러 아픈 이야기들과 눈물겨운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동네를 매일 걷고 또 걷다가 저녁에는 기도회를 나간다. 걷기와 기도하기,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에 놀라워 한다.



18.


17년 중 임신과 모유수유 2년을 제외한 시간 동안 매일 마셨던 커피를 끊고서 3일은 극강의 예민함과 피로로 힘들어 하더니, 그 이후로 재미있는 변화를 경험했다. 첫째는 피부가 맑아져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본 점, 둘째는 '내가 꼭 해야할 일'들만 집중해서 처리하게 된 점. 커피를 마셔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철벽 같이 믿었던 17년의 믿음과 진리가 무너진 셈이다. 각성 효과가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지니 쓸데 없는 일에 기웃거리는 에너지가 없어진 것.



19.


트렌드 코리아 2023 내용 중 '인덱스 관계'라는 것이 있다. 인덱스 라벨처럼 중요도 혹은 필요에 따라 붙였다 떼었다 하며 인맥 관리를 하는 게 트렌드가 되어간단다. 궁금해서 오? 하고 내가 팔로잉하는 계정을 들어가서 보니, 내게 먼저 '맞팔해요~' 하며 선팔했던 분들이 언팔을 해놓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어느 날, 필요없어진 것이다.



20.


매일 밤이면 '하루가 너무 짧다'고 울먹이는 아이에게 '하루는 누구에게나 24시간'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아주 공평하고 근사하게 부여한 선물인 거라고.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며 잠자리 기도를 하는 그 기도제목에 '시간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을 추가하게 되었다.



21.


"엄마, 부동산이 뭐야?"

"음, 마트에서 음식을 사듯이, 집이나 땅을 사려면 부동산으로 가야 해."

"집 마트야?"

"응.... 그렇네.."

"근데 집 마트가 왜 이렇게 많아?


그러게. 집 마트가 많아 집 걱정 없는 대한민국 만쉐이. 서울특별시 만세.



22.


코로나가 시작되고 제대로 운동을 못하고 있다. 운동 의지가 완전히 사그라든 건데, 운동을 하지 않을 때도 절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유연성'이다. 아침 저녁으로 20분씩 무지막지한 스트레칭을 한다. 유연성을 갖추어 놓으면 몇 년만에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 할 때 덜 힘들다. 마흔의 클라이밍 Climbing을 위해. 화이팅.



23.


세상에 나쁜 놈들이 많으니까 누나 같이 헤헤, 거리고 다니는 여자는 조심하라고 갑자기 어느 날 아침에 남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괜히 사람들하고 친해지지 말고 어울려 놀지 말란다. 매형이 그렇게 힘이 센 사람은 아니니까 누나는 특별히 조심해라, 고 했다. 여자가 살기 너무 험하다고.


아니다. 남자가 살기에도 어려운 세상이다.



24.


요즘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이렇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20대에는 이 가사가 참 무서운 가사라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하나님의 꿈이, 그 원대하고 경이로운 꿈이 나의 비전이 되면 내 삶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벅차게 될 것이고.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왜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을까. 감당할 만한 자에게 그 비전을 허락하실 분일텐데. 내가 뭐라고 꿈을 꾸기도 전에 겁 먹고.



25.


맨 마지막 사진. 가을의 나무들이 전부 나뭇잎들을 떨구고 을씨년스럽게 연약해 보였는지 아이가 길을 가다 잎이 안 떨어진 한 나무를 보고 '엄마, 이 나무는 정말 강한 나무 같다.' 했다. '강한 나무가 좋아 보이니.' 했더니 아니란다. 자기는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조금 더 얇은 나무가 예쁘다고. 강한 나무는 센 바람에 부러질 것 같다고 했다.



26.


2년째 같은 헤어샵, 같은 디자이너 언니한테 뿌리염색을 하러 간다. 그날 그날 내 표정과 상태를 잘 살펴주며 적절한 수다와 과하지 않은 환대로 마음이 편해져 이 샵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고는 마사지를 해주는 이 언니의 손힘이다.



27.


출산 이후로 종잇장처럼 너덜너덜해져 손 하나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내게 손힘 좋은 여인들은, 무조건 언니다. 이 언니들은 내게 잼 뚜껑을 열어줄 수도 있고, 가위로 고기도 잘라줄 수 있을 것이다. 손힘, 만세.



28.


최근 인스타 양쪽 계정으로 부지런히 내 일상과 일 이야기를 올렸더니 지난 금요일 남편이 '요즘 수고가 많더라. 대체 언제 쉬니' 하더니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자진 떠나주시며 주말 1박의 휴가를 내주었다. 인스타 기록의 유무와 상관 없이 나는 늘 수고했으나, 기록을 했더니 받게 된 꿀 휴가. 앞으로 좀더 부지런히, 낱낱이, 세밀하게 기록하기로 한다.



29.


몇 일 전 개그우먼 정선희 집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 것은, 자신의 고통을 우상으로 여기고 슬픔에 허우적대며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하나님 앞에서 꺼이꺼이, (물론 이것도 중요) 만 하지 말고 그 고통을 두고 하나님과 어떤 위로와 사랑의 대화를 했는지, 그 회복의 과정이 얼마나 귀한지 공동체에 고백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오랜만에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있는 고통이지만,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고유하므로, 그만치 귀하므로, 우리는 누군가 '나 이렇게 고통스러웠지만 이렇게 일어났습니다.'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0.


남편과 아이가 시댁으로 가있는 동안, 시어머니는 혼잣말로 '청하는 뭐 먹니.. 청하는 뭐 먹고 사니.. 뭐라도 좀 먹는 거니..' 하셨단다. 아마 비슷한 시간에 나도 '엇, 뭐 먹지, 나 뭐 먹지.' 하다가 떡을 하나 주섬주섬 먹었을 것이다.



31.


아이는 '열린 결말'의 창작책을 좋아한다. 상상의 여지가 충만해서 책을 덮은 후에도 작가의 스토리에 이어 자기가 창작한 이야기를 엄마에게 소개하느라 바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창작을 한다. 어른들은 못하는 걸 아이들은 잘한다.



32.


열린 결말. 결과를 상상하며 걸을 수 있는 과정과 여정. 그러므로 어떤 결과가 나와서라기보다는 과정 자체가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것. 다르게 말하면 여백. 결과가 어떤 모양일지 모르므로 지금 있는 이 곳에서 약간의 여백을 두고 두리번 두리번 해보기. 이건 또 다시 말하면 여유. 열린 결말 없이, 여백 없이 달렸다면 못 만났을 인연과 상황과 자연과 예술을 만나게 되는 여유.



33.


어린이집 엄마들과 아무런 연결 없이 아이를 여섯 살까지 키우고. 이 가을, 우연히 연결된 아이의 같은 반 여자친구들의 엄마 모임에 가서 좋은 사람을 만났다. 뜨개질을 좋아해 뜨개질을 하다가 뜨개질 문화센터 강사가 되어 소소하게 강의 나가고 뜨개질하며 육아를 한다고 했다. OO을 좋아해 OO으로 소소하게 일을 만들고 OO를 하며 육아를 해낸다, 는 이야기는 늘 우리 엄마들을 설레게 한다.



34.


어성초 비누가 피부에 좋다고 생각하고, 콩떡이 새벽 글쓰기 시간에 좋은 간식이라고 생각하며 가을을 보낸다.



35.


오해.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 미안하다 말을 못하고 지내면, 언젠가부터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면서 오해가 시작된다. 잘못된 생각이고, 나쁜 마음이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잘못한 게 없다.




2022.11.18

서른 일곱 누가 볼지 모를 인스타그램에

10월과 11월에 쓴 문장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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